[종이책] 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 쉼이 있는 삶을 위하여
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 ISBN
    979-11-91438-91-8 (03330)
  • 저자
    이승원 지음
  • 제본형식
    종이책 - 무선제본
  • 형태 및 본문언어
    219 p. / 135*210 / 한국어
  • 가격정보
    14,000원
  • 발행(예정)일
    2022.11.21
  • 납본여부
    납본완료
  • 발행처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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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에서 왜 제대로 쉬지 못하는지 근본적 원인을 사유하고, 대안적 삶의 의미를 제시한다. 소비사회에서 노동의 소외, ‘휴식’마저도 소비를 통해 구매하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제기한다. 워라밸이 의제로 떠오른 한국 사회에 진정으로 잘사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쉼’과 편안함 삶에 대해 성찰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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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의자가 없는 풍경
풍경 하나, 느티나무와 의자 7|풍경 둘, 집으로 가는 두 갈래 길 11

1장. 살기 위해 죽어야 하는 사회
불안이 희망을 잠식하는 사회 21|왜 잘살기 위해 애쓰면서도 삶을 쉽게 포기하는가? 27|불안이 일상이 된 ‘자살 사회’ 30|살기 위해 택하는 죽음, ‘생계형 자살’ 34|소비의, 소비에 의한, 소비를 위한 시간 39|오늘이 낡아지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소비의 유혹 44|상품이 된 공공재를 얻기 위한 ‘자기계발’ 49|미래를 저당 잡혀 오늘을 포기한 부채사회 55|죽음이 희망이 되고 냉소가 습관이 된 사람들 60|쉬기 위해 쉼을 포기하는 사람들 63|실업자, 이생망과 N포 세대, 오늘날의 호모 사케르 65|잘살게 될수록 불안해지는 세상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68|‘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사회의 공멸 71|‘오리엔탈 특급’, 집단적 익명에 의한 타살 76|살려달라는 요청에 대한 응답, ‘기다려라’ 80|스스로를 책임지는 데에서 나오는 가치 86|존엄한 삶을 지속하기 위한 기본 역량 89|우리의 ‘존엄성’을 위한 방향의 전환 95

2장. 일과 소비에 대해 착각하는 사람들
노동은 욕망의 완성인가? 103|욕망을 욕망하게 하는 판타지, 착각 노동 109|스스로를 숫자로 바꿔 헤아리게 하는 소외된 노동 117|버려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는 자기계발의 판타지 122|과잉 노동에 빠진 사람들 126|공공재의 회복과 일상의 동선: 무상의료와 예방의학의 경우 132|소비를 쉼으로 착각하는 사회 139

3장. 우리는 편안함에 이를 수 있을까?
통증의 기쁨, 불안의 슬픔 145|당신과 나의 통증에 대한 경청 152|존재하기 위한 의지, 삶에 대한 의지 155|자기결정권과 자원접근성을 상실한 ‘현대의 가난’ 161|레퀴에스코 에르고 숨 167|쉼, 존엄함을 회복하는 적극적인 행동 173|송철호와 이지안은 편안함에 이를 수 있을까? 176|‘공생공락’을 위하여 184

4장. 잠시 멈춰야 돌아오는 생의 리듬
‘오멜라스 사람들’이 사는 법 191|마주침의 공터, 헤토로토피아를 위하여 194|새로운 리듬을 위한 변주, ‘정지 운동’ 204|바틀비가 마주침의 공터로 나갔다면 214

책을 마치며 217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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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정치학자 및 민주주의와 사회혁신 연구자. 영국 에섹스 대학(University of Essex)에서 포퓰리즘, 담론이론 연구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에게 사사. 시민의 민주적 일상과 지속 가능한 도시 전환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민주주의』, 역서로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등 다수가 있다.
요약.본문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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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서 벗어난 어떤 평안을 위해, 사람들은 최신 캠핑 도구와 등산 장비를 SUV 차량에 싣고 천연의 삶을 즐기러 산으로 들로, 강과 바다로 잠시 떠나곤 한다. 웰빙well-being, 행복happiness, 건강fitness의 뜻을 모두 담은 단어 ‘웰니스’wellness는 21세기 신종 산업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철학이자 생활양식이 되었다. 노후 연금, 양육에서 벗어난 중년의 목가적 삶, 가족과 이웃이 함께하는 품격 있는 주택, 도시의 고단함을 잊게 하는 고가의 빈티지와 최첨단 디지털 제품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21세기형 답을 주는 듯하다. 사람들은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일하려 한다. 웰니스 열풍과는 반대로 2003년 카드 대란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자살이 급격히 늘어났다. 자살률은 이후 18년 이상 계속해서 증가 추세를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매일 평균 30여 명이 삶을 비관하며 목숨을 끊고 있었다. 스트레스성 성인병 환자 수도 함께 증가했다. 한쪽에서는 ‘생명’과 ‘건강함’이 거대 산업과 생활양식의 유행을 선도하고, 이 화려한 인간 세상의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선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는 선전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그런 행복을 먼발치에서 남 일처럼 바라보며, 증오와 절망 속에서 스스로 혹은 가족과 함께 목숨을 끊는 사건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29~30쪽)

하지만 노동을 멈추고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만끽해야 할 이틀의 휴일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일하는 5일 동안 오히려 초과 근무까지 악착같이 해야만 했다. 새 차, 새 캠핑 도구, 새 스마트폰은 신용카드 할부와 손 안의 핀테크를 통해 후회할 겨를도 없이 쉽게 구매할 수 있다. 다음 달 문자 메시지로 전해지는 신용카드 청구액을 확인할 때쯤이면 후회는 이미 늦다. 여행지 숙박비와 교통비, 식사비 할부는 덤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틀 동안 주어진 휴일을 맘껏 즐기기 위해 주5일 초과 근무도 잘 버텨낼지 모른다. 문제는 일주일 중 이틀 동안 내가 쓴 카드 비용 때문에 나머지 닷새를 점점 더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을 위해 주5일 근무제가 출발했지만, 현실은 뭔가 이상하다. (40쪽)

하지만 이 버킷리스트가 자기 생활을 돌아보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졌다기보다, 온라인에서 넘쳐나는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음식들, 입어야 할 옷, 가야 할 여행지들, 마셔봐야 할 고급 와인 목록과 마주치면서 뭔가에 홀린 듯 그저 ‘장바구니’를 가득 채운 것이었다면 그 느낌은 다를 것이다. 삶의 청량감과 자유를 새롭게 느끼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또 늘어난 새로운 숙제처럼 다가올 수 있다. 우연한 마주침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의 아름다움보다 어느 날 갑자기 각종 상품으로 채워진 버킷리스트 자체가 내 삶의 목적 자체가 되면서, 자유로운 삶의 선택은 이 버킷리스트라는 창살 안에 갇힐 수 있는 것이다. (47쪽)

성과사회는 피로사회이고, 피로사회는 곧 부채사회다. 즉 성과사회는 부채사회의 부채노동으로 성과를 만드는 사회이고, 누군가의 저당 잡힌 노동과 피로 덕에 누군가의 안락함이 보장되는 매우 불평등한 사회다. 피곤한 사람에게는 자양강장제가 아니라 휴식이 필요하지만, 쉴 수가 없다. 부채 때문에 쉴 수 없는데, 누군가는 이를 꿈을 이루는 열정의 과정이라고 포장한다. (56~57쪽)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피로사회, 성과사회, 일 중독, 자기 계발, 취업 걱정 등은 바로 고도로 정교화된 칸트식 노동 예찬의 다른 이름들이다. 부모의 유산이라는 불로소득으로 사는 사람과 ‘흙수저’로 태어나 살아야 하는 사람 모두에게 노동은 예찬의 대상이 아니다. 전자는 스스로 노동할 필요가 없다. 후자는 노동이 지긋지긋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인 데다가, 자기 노동에 대한 대가 또는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는 크게 좌절하기도 한다. 사회적 가치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부동산 투기로 몇십 배의 이익을 얻으며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부동산 투기로 인해 오른 전월세를 해결하기 위한 대출 이자를 갚으려고 원치 않는 노동을 쉬지 않고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교할 때 느끼는 좌절감도 엄청나다. ‘그나마 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자’라고 아무리 스스로 위로하려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벼락 거지’가 된 듯한 상실감을 느끼고, ‘뼈가 부서지게 일해도 나아지기는커녕 빚만 늘어난다’며 자신이 짊어진 노동의 무게를 버거워한다. 이런 현실을 뒤로한 채 외치는 노동 예찬은 주어진 노동만이 욕망을 실현하고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하고 최종적인 방법이라는 ‘착각 노동’이라는 판타지를 퍼뜨린다. (110~111쪽)

쉴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낯설다는 수준을 넘어 세상과 항시적 긴장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일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고, 개인과 사회의 통증은 결국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불안과 고통이 된다. 우리는 나와 타인의 통증을 공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쉼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쉴 수만 있다면, 함께 느끼는 통증은 함께 살아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통증을 치유해내면 함께 살며 즐기는, 공생공락의 삶을 이룰 토대가 마련된다. (155쪽)

유대교에서 안식일은 6일 동안 신께서 창조행위를 하시고, 그걸 보고 기뻐하며 모든 일을 멈추고 하루를 쉬었다는 데서 기원한다. 신이 자신의 창조행위 이후 스스로 가장 먼저 행한 ‘쉼’을 피조물인 인간에게도 명령했다는 것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시시포스의 노동을 멈추고, 즉 인간의 삶을 잠시 벗어나 쉼・안식이라는 신의 행위를 인간도 똑같이 취하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 즉 쉼은 거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쉼이 사람의 존엄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생각이 여기에 덧붙여질 수 있으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requiésco ergo sum(레퀴에스코 에르고 숨).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럽 근대사상의 문을 연 르네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통해 인식론적 주체를 확립했다.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개인과 사회가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적 주체를 제안하기 위하여 “나는 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requiésco ergo sum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틴어 ‘requiésco’는 ‘쉬다’, ‘휴식하다’, ‘위안을 찾다’, ‘위로받다’, ‘쉬게 하다’, ‘멈추다’와 같은 뜻이 있다. ‘quiésco’나 ‘cesso’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쉼’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requiésco’를 사용한 기독교 『성경』 라틴어 판본 일부를 살펴보자. 「창세기」 2장 2절과 3절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에서 ‘쉬셨다’의 라틴어 표현은 ‘requiésco’를 기본형으로 하는 ‘requiēvit’와 ‘requiēverat’이다. 다시 말하지만 쉼의 상태란 통증이 불안으로 바뀌기 전에 이 통증을 잘 관리함으로써 편안하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여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 쉼의 상태가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169~170쪽)

공생공락의 쉼을 상상하기 위해 ‘숲’을 떠올려보자. 숲은 쉼을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다. 숲에서 생명체는 고유한 생애주기를 보낸다. 하나의 개체는 다른 개체의 시간을 침해하지 않고 자기의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다. 시간이 침해되고 속도가 강요된다면, 오히려 숲의 생태계는 깨진다.
숲에서는 1년생 식물과 수백 년 된 나무가 공생하고, 음지의 버섯과 태양을 향해 가지를 뻗는 활엽수가 공존하며 자연의 생태계를 이룬다. 땅속 벌레와 각종 미생물이 동식물 유기물을 분해하여 숲의 나무에게 자양분을 제공하고, 나무 그늘에서 새들과 동물들이 살아간다. 숲을 구성하는 다양한 일원들의 생애주기는 제각각이지만, 생명체들은 서로 삶의 기반이 되어 함께 사는 숲을 만든다. 쉼이 있는 사회는 숲과 같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따로 또 같이 차별이 아닌 평등한 차이 속에서 유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 기반이자, 존재의 의 미가 된다. 우정, 사랑, 환대, 연대는 쉼이 있는 사회의 소중한 자양분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 기반이 되기 위해서는, 그래서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186~187쪽)

도시의 물리적인 공간이든, 일상의 동선이나 생애주기의 어느 한 빈틈이든, 마주침의 공터가 남아 있지 않은 세상에서, 이런 공터를 상상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채 오히려 과도한 개발이나 과잉 노동을 추구해야 하는 장소만 있는 세상에서, 개인의 일상의 동선과 생애주기는 정해진 장소와 장소의 연결망 속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된다. 그와 반대로 마주침의 공터, 쉼의 장소가 있는 사회는 획일화된 중심과 목적성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마주침이 있는 쉼의 장소는 기성의 가치가 아닌 새로운 가치를 발생시키며 그 가치는 이 장소에 연결된 존재들이 공유한다. 일상의 다양한 동선도 새롭게 그려진다. 동질화된 일상의 동선과 생애주기가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 일상의 다양한 동선은 여러 가지 삶의 선택지를 품은 채 위기극복의 대안을 제시한다. (200~201쪽)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무더운 오후의 땡볕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놀았을 때도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수돗물에 목을 적시는 촌각도 아까울 정도로 우리는 모래밭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서 땡볕에 타면서도 지치고 지치도록 놀았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불안하지 않았다. 허기가 느껴지고,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나고, 목과 팔뚝에 땟국이 잔뜩 껴 있어도 마냥 즐거웠다. 해 질 녘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갈 때도 발걸음은 놀러 뛰어나가던 아침과 다르지 않았다. 유년 시절 맘속에는 항상 어떤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207~208쪽)

지금의 리듬을 멈추고, 정지하려면 그만큼의 힘이 필요하다. 그 리듬이 혼자만이 아닌 이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만큼, 이 리듬을 멈추고 내가 정지하려면 나 혼자서는 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와 함께 이 강력한 리듬을 멈추기 위해 힘을 모으자고 말할 누군가를 찾기도 쉽지 않다. 어느 누군가는 나를 이상한 사람, 아니 자신의 행복한 리듬을 파괴하려는 적으로 몰아세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생긴다. 멈추는 힘은 새로운 방향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 지금 우리를 밀고 가는 힘에 대한 대항이기에 어떤 방향이나 지도력을 먼저 내세우는 것은 성급할 수 있다. 정지 운동을 위해 지금 필요한 행동은 우리를 소비와 부채, 경쟁과 소외, 착각 노동과 과잉 노동, 그리고 생계형 자살로 밀고 가는 어떤 힘의 속도와 방향에 불안과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과 더 자주 마주치는 것이고, 더 가깝게 공감하는 것이다. (211~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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