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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벽으로 감싸고 지붕을 덮어 한정된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뿐입니다. 공간에 감싸여 있는 동시에 감싸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건축입니다. 건축은 조각 작품처럼 밖에서 바라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건축 공간은 체험되는 공간이며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엄마의 뱃속에 있다가 세상으로 나온 갓난아이가 우는 이유는 무한한 공간에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품어주고 따뜻한 포대기를 감싸는 것 자체가 공간을 한정해주는 행위입니다. 사람을 ‘감싸는 공간’, 그 안에서 체험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건축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며, 시대를 막론하고 변함이 없는 건축 공간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내부와 외부’를 생각합니다. 내부와 외부는 인간을 위한 공간에 질서를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건축 공간의 시작은 경계를 짓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경계는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주고 맺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경계를 지우고 더 확장된 공간에서 살고 싶게 합니다. 내부와 외부는 귀속감과 정박의 감각을 줍니다. 그리고 도시를 상대하므로 내부와 외부의 ‘사이’를 다양하게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건축을 공부하면서 제일 많이 쓰는 말이 ‘공간’입니다. 그래서 공간을 건축가의 전유물로 여기기 쉽습니다. 때로는 건축가가 공간의 창조자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건축가는 벽돌 한장 굽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공간을 창조하고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공간은 주어진 것이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공간의 창조자라는 관념은 근대건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근대건축은 사람을 감싸기보다는 반대로 무한을 향해 확장되고 펼쳐지는 투명한 정신적 공간,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공간을 탐구했습니다.
우리 세대가 극복해야 할 것은 균질 공간입니다. 어디나 똑같고 모든 기능을 담았지만 삶과 경험을 무력하게 만드는 공간이 주변에 많습니다. 대부분의 균질 공간은 근대 이후 건축이 만들어냈습니다. 기술 주도 사회로 발전하면서 건축 공간은 도시, 자본, 속도, 교통, 정보의 영향을 받아 균질하고 거대해지며 자본을 위해 생산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건축의 과제는 아름다운 형체를 만들기 이전에, 근대 이후의 균질 공간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대한 물음 안에 있습니다. 건축 공간은 3차원의 공간이며, 그 안에서 멈추고 움직이며 경험하는 공간입니다.
현대건축에서는 공간에 대한 논의가 퍽 복잡합니다. 근대건축과는 달리 건축가만이 아니라 사회학자를 비롯한 다른 영역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만큼 건축 공간이 건축가 개인의 창조적 작업에 머무르지 않고, 도시와 현실 사회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 건축 공간의 주제가 그만큼 넓고 깊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 건축 공간을 공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정리하고 건축과 공간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건축 공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정보와 관련됩니다. 건축 공간이란 닫히고 열리며 감싸는 것이 논의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정보는 물질과 무관하게 확산하고 사물을 균질하게 만들 뿐 아니라, 거리와 시간에 대한 관념을 크게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정보는 건축의 근간을 흔든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이 정보사회가 정보의 공간에 준하는 새로운 빌딩 타입을 요구하고 있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도 크게 바뀌었으며, 도시를 만드는 건축으로 갱신되기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정보는 건축을 새롭게 바라보는 배경이요, 참조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