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부산 속 건축
부산 속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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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다양한 무늬로 직조된 도시 부산



부산은 우리나라 지도에서 보면 동남부 모서리에 있다. 동해에 절반, 남해에 절반 몸을 걸치고 있어 도시 어디서든 바다 기운이 물씬 풍긴다. 그러면서도 태백산맥의 준령이 바다로 곤두박질치기 직전에 마지막 위세를 떨치는 곳이 부산이다. 금정산을 비롯해 장산, 황령산, 수정산, 구덕산 등 400-800미터의 구릉성 산지가 도심지 내에 산개해 있다. 거기에 1,300리를 달려온 낙동강 하류가 큰 폭으로 흐르고, 각 산에서 내려온 개천이 모여 수영강, 온천천, 동천 같은 물길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부산은 땅만 팠다 하면 고대 유물이 발굴될 만큼 시간의 결이 두텁게 단층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일본과의 역사 속 교류와 쟁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6?25동란 통에 유입된 전국의 피란민과 그의 후세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것도 부산의 한 단면이다. 수영비행장도, 하야리아(Hialeah) 부대도 이제 철수해 나가고 없는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과 공원이 들어서 있다. 바다를 매립해 만든 땅 위에는 초고층 빌딩들이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바다와 바다를 건너는 멋진 대교들은 도시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이처럼 부산이라는 도시는 다양한 무늬로 직조되어 있다. 바다와 강과 산이 도시와 뒤엉켜 있고, 누적된 흔적과 첨단의 시간성이 도시를 수놓고 있다. 거기에 드나듦이 잦은 항구와 철도를 끼고 사는 부산 사람들의 묘한 정서가 맞물려 독특한 도시의 결을 형성한다. 그야말로 다이내믹해 시쳇말로 표현하면 ‘짬뽕’이고, 좀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면 ‘혼종성(hybridity)’의 랜드스케이프(landscape)라 할 수 있다.

도시 부산의 속성을 단순 아이콘이나 몇몇 대표 색으로, 혹은 한둘의 대형 랜드마크 구조물로 납작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복잡다단함 때문이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 지점에서 발생하는 교역과 국방의 모순성은 어쩌면 태생적 숙명과도 같다.

유입 문화와 토종 문화가 부딪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어느 사이 스며들어 융합적 창조에 따른 새로운 아이콘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래서 조금은 겉모습이 거칠고, 언제나 완결되지 않은 과정으로 비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대륙 침략의 교두부로 조성했던 수영비행장이 지금은 고층 빌딩숲을 이루는 센텀시티로 변모했다. 이곳에 국제영화제를 치르는 ‘영화의전당, 그리고 세계 최대 규모 백화점으로 기록된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이 세워졌다.

60-80층 마천루 아파트와 오피스 빌딩이 즐비한 마린시티 양옆으로는 해양 레저를 즐길 수 있는 요트계류장이 있다. 그런가 하면 피난 시절 임시 거처로 서둘러 지은 판잣집, 일명 ‘하코방’들의 흔적은 도시 곳곳에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지을 땅이 없어 산의 허리춤까지 타고 오른 집들은 일종의 콜라주처럼 각기 조금씩 다른 다양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 양태가 오히려 오늘날에는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친근함으로 여겨져 ‘산복도로 르네상스’니 ‘감천문화마을’이니 하는 이름으로 과거의 향수를 자극한다.

기장-송정-청사포-해운대-광안리-용호동-북항-영도-송도-다대포로 이어지는 해안 라인에는 바다와의 조응을 고려한 세련된 건물들이 날로 많아지고 있다. 북항 재개발, 동부산 관광 단지 조성, 동해남부선 폐

선 철로 활용 등의 프로젝트로 친수 공간은 좀 더 폭넓게 조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가 하면 일본인이 세운 최초의 공공 건축물과 방위 구역, 미군정이 주둔하기 위해 만든 군부대와 행정처, 퇴각한 임시정부가 사용했던 시설물,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공원과 전시관 등 깊은 애환을 남긴 과거의 흔적도 부산이 가진 또 하나의 자산이 아닐 수 없다. 흑백 사진만 남기고 사라진 근대 건축물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나마 지금 남아 있는 몇몇은 보존과 재생의 논의를 거쳐 도시의 시간적 층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건축은 이같이 교차하는 숱한 환경적, 역사적, 문화적 결 위에 한 땀 한 땀 또 하나의 결을 덧입히는 작업이다. 땅의 결을 존중하고, 시간의 결을 보살피는 그런 멋진 건축물이 우리 주변에 많아질수록 도시도 깊고 풍성해질 것이다. 표피적이고 단발적이고 상업적인 결만이 남발하는 차디찬 세상 속에서,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오래된 결을 다독이고 밖으로 표출시켜놓은 건축물은 분명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펼쳐 보여준 우리 주변의 건축물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알아봐주고 격한 환영의 표현을 해주어야 한다.

이 책에 선별해 소개한 건축물들은 최소한 한 대목 이상의 결이 느껴지는 사례다. 신중한 마음으로 결을 짚어내고 구축적 장치로 절묘하게 엮어낸 몇몇 건축물은 감동을 전달하기도 한다. 땅의 잠재적 본성을 들추고, 중첩된 시간의 의미를 되살리고, 내재되어 있던 깊은 정서의 결이 스며나게 함으로써 대면하는 이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기운이 상승하게 한다. 이런 공간이 부산에 더욱 많아져 세련된 직조 도시(weaving city)가 되길 희망하며, 또한 이런 공간을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내놓는다.



2016년, 유엔기념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연구실에서

이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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