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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8년에 미진사에서 『한국디자인사』라는 이름으로 초판이 출간되었고, 2009년에는 문화부에서 주관하는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었다. 2011년에 절판되었다가 안그라픽스에서 다시 개정증보판을 내게 되었다. 사실 확인이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했고, 새로운 내용을 많이 추가했다. 책 제목도 딱딱한 느낌을 조금 벗어볼 요량으로 바꿨고, 도판도 가능한 대표성을 가진 사진으로 교체했다. 완전히 새 책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새 이름에 어울릴 만큼은 바뀐 것 같다.
우리는 우리 디자인의 역사에 관심이 없고, 윌리엄 모리스의 사상이나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에 대해서만 배운다. 마치 우리에겐 아무런 디자인적 활동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예술사를 서구의 기준에 맞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정리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디자인사를 정리하는 일은 어려움이 따른다. 역사적인 사실을 추적하는 것도 어렵지만, 평가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역사가 짧고 디자인계가 좁은 탓에 작품에 대한 분석이 자칫 작가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비춰지기 쉽고, 계파 간의 갈등이 남아 있어 어느 쪽에서건 공격받을 빌미를 제공하게 되기도 한다. 이 책은 근대 이후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의 파편을 모아 궤를 맞춰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을 추려내 묶은 것이다. 서구 근대화 과정과 모더니즘 발전사의 도식을 우리 역사에 끼워 맞추는 일은 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으로 과장되고 각색된 신화로서의 역사는 이 책에 없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디자인 현실은 참으로 기괴하다.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디자이너보다 정치인들이 더 많이 쓴다. 거품처럼 끓어오르던 ‘한국적 디자인’에 대한 논의는 언제부터인가 사그라들었다. 대학에서는 여전히 근대와 근대성, 그리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르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의 근대는 어떤 모습이었으며, 서구의 모더니즘과 우리의 그것은 어떻게 달랐는지 증명하지 않는다. 왜 한국의 미가 자연미 혹은 선의 미, 백의 미로 대표되는지, 왜 한
국을 상징하는 색깔이 오방색이 되었는지, 왜 기념비적인 건축물은 하나같이 전통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지, 왜 디자인의 진흥을 국가가 담당하게 되었는지, 왜 대학의 디자인과는 천편일률적으로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한 디자인만을 가르치는지, 디자인이 정치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고 정치인은 디자인을 통해 곧 선진국이 될 것처럼 장밋빛 미래를 외치는데도 왜 현실의 디자인 문화는 이토록 척박한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제는 서구의 디자인사를 백번 들여다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현재 우리 디자인이 가
진 문제를 이야기할 때가 된 듯도 한데, 여전히 무심하다. 이 책은 서구의 디자인을 서술하는 기준인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틀을 배제하고 ‘근대화’와 ‘민족주의’라는 틀을 기준 삼아 해석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간 순서에 따라 7장으로 나뉘어 구성된다.
1장에서는 서구의 디자인사를 간단히 요약하고, 서구와 다른 우리의 디자인사를 이해하기 위해 미리 알아야 할 몇 가지 키워드를 소개한다. 흔히 한국의 근대 디자인은 일제강점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한국의 근대 디자인이 일제강점기의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등장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2장에서는 1945-1950년대의 해방 이후 미국과 미군에 의해서 한국 사회가 미국 문화권에 포함되어가는 과정과 한국의 근대 디자인이 싹트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이식된 문화로서의 근대 디자인과 디자인 교육, 미국 국무성의 한국 디자인 진흥 프로젝트를 살펴봄으로써 우리 사회에 디자인이 어떻게 도입되고 정착되어나갔는지를 살펴본다.
3장에서는 1960-1970년대의 강력한 개발독재기를 거치며 진행된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와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디자인 진흥의 모습을 다양한 예술 분야의 사례와 비교하며 들여다본다. 수출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포장’으로서의 산업디자인과 독재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한국적 디자인’이 출현한 이 시기의 디자인은 매우 독특한 개성을 띤 채 현대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며 현실 속에 살아 있다.
4장에서는 1980년대를 거치며 나타난 민주화의 열망, 고도의 경제성장과 국제화, 국민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된 강력한 스포츠 문화 정책 등 다양한 사회적 변화가 디자인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 폐쇄된 통제 국가에서 열린사회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상업적 디자인, 그리고 국제 대회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디자인의 오리엔탈리즘적 양상은 이전과는 또 다른 독특한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 기술로서의 디자인과 문화로서의 디자인이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5장에서는 1990년대 초, 탈냉전 시대의 도래와 세계화 정책, 시장 개방, IMF를 거치며 맞닥뜨린 선진국의 시장 잠식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디자인이 어떻게 그 역할을 변화시켜나가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문민정부의 출현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속에서 새롭게 재조명되는 전통문화가 문화산업화 논의를 거치며 대중소비 시장 속으로 흡수되어가는 과정을 여러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6장에서는 2000년대 세계화와 지방분권화 시대를 맞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게 된 상업적 디자인과 보편적인 복지 차원에서 전개되는 문화적 디자인, 정당과 정치권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정치적 디자인이 공존하는 현재의 모습을 살펴본다.
끝으로 7장에서는 우리에게 디자인이란 무엇이며 한국의 디자인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반성을 적었다. 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로서 한 번쯤은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화 정체성’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도 던져보았다.
정권의 성향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했지만, 사건을 시간 순서에 따라 나열하지 않고 몇 가지 큰 주제로 재구성해 해석을 시도했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연대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과 국제 정세 등에 관한 설명에도 비교적 많은 부분을 할애했고, 또 한국 디자인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정부의 정책 활동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책은 디자인을 분석함에 있어서 전반적인 조형 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회화와 건축, 영화 등의 경향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 있다. 반면 서구 디자인사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작가의 사상과 활동, 작품 해석 등은 하지 않았고, 전문 지식보다 보편적인 역사 이해에 집중했다. 과거를 현재의 잣대로 평가해 본의 아니게 국가와 사회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신 원로 디자이너와 교수님 들께 행여라도 누를 끼치는 부분이 있다면 지면으로나마 죄송함을 표하고 싶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박암종 선생님이 기록해두신 여러 자료들을 참조했고, 이외에도 수많은 선생님들의 선행 연구과 신문·잡지 자료들을 차용하고 있다. 최대한 저작권의 공정한 사용 범위 내에서 사용하고자 노력했다. 자료 사용에 도움을 주신 한국전통문화학교의 최공호 교수님, LG전자,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김정림 님, 최원규 님, 윤명국 님과 권용준, 최은림 등 여러 도움주신 분들께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부족한 글을 출간하도록 결심해주신 안그라픽스 김옥철 사장님과 문지숙 주간님, 정신없는 글을 멋진 책으로 탈바꿈시켜주신 강지은, 안마노 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