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하고 바쁘게 사느라고 좋아하는 것들을 뒤로 한채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살고지고 살고지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에 2014년 가을의 끝자락에 걸린 핏빛 단풍잎을 따라 설레는 소식 하나가 나에게 왔다. 국립 중앙도서관, 조선일보, 교보문고 주최 길위의 인문학 18차, 11월28,29일 동안 ‘승자의미소 패자의 눈물’이라는 타이틀 아래 초청강사 홍인희 강사님을 모시고 강원도의 원주, 횡성 역사탐방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종택에서
이른 아침부터 낮게 드리워진 잿빛 하늘은 우리가 문막 연안김씨 종택에 다다르니 결국 비를 부른다. 주최측이 장만한 우비를 쓰고 연안김씨 의민공 종회 앞에 서니 그 옛날 중전으로 간택되어 떠나는 인목왕후를 바라보는 아버지 연흥 부원군 김제남의 흔들리는 눈빛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아흔 아홉칸의 명문가의 따님을 귀한 대궐의 안주인으로 보내는 불안함과 권력다툼의 참혹함을 예견함 때문일까?!
왕기가 서려있다는 격암 남사고의 예언처럼 이곳 원주 문막읍 부론면, 지정면은 4명의 왕실 여인을 배출한 곳이다. 이들은 같은 향리 출신들로서 각기 다른 왕실 여인으로 겪어야할 숙명을 안은채 공빈김씨는 선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으로, 광해군의 어머니로,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로 중전에 간택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가 된다.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과 혼인한 한준겸의 넷째딸은 후일 인조반정으로 왕후에 오르며 효종의 어머니가 된다. 영친왕의 어머니 또한 명성황후 사후 엄귀비로서 대한 제국의 안살림을 맡은 황귀비에 이른다. 귀하디 귀한 왕실 여인으로서 겪었던 그들의 참혹함은 인목대비가 단연 최고이다. 역모죄로 몰린 친정 아버지 김제남과 두 남동생은 사약을 받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 중 증살 당한다. 어머니와 조카들까지 제주도로 유배되는 등 친정집안이 풍비박산이 된다. 김제남은 죽어 부관참시까지 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풍수에 옥녀세발형(아름다운 여인이 머리를 감는다)이라는 뜻이 있듯이 아름다움에는 독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 로맨티스트의 영원한 패자 벽계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벽계수라 일컬어지는 이 종숙은 세종대왕의 증손이며 조선 사대부들의 마음을 훔친 절세가인 황진이를 폄하하여 도전장을 내본다. “나는 절대로 황진이에게 넘어가지 않을 것” 이 말을 들은 절세가인 황진이는 차디찬 미소뒤에 결의를 한다. 벽계수가 말을 타고 지나는 길에 시한수를 읊으며 유혹하니 그녀의 낭랑하고 청아한 목소리에 홀려 낙마를 하고 만다. 이름하여 낙마곡이 된 이 시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넘나들며 기개 높은 황진이의 차디찬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강원감영
원주시의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감영의 건축형태를 알려주는 곳이다. 현재로 치면 도청 소재지쯤이 되는곳이 아닐까 한다. 현재의 위치로부터 사방 사십리가 감원감영이라 하며 부속건물이 60여채나 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6.25 동란 중 큰 피해를 입어 지금은 선화당과 감영의 문루만 남아있다. 선화당은 임진왜란 후 1667년에 중건된 정면 칠칸 측면 네칸의 겹처마 단층팔작지붕 건물로 평범한 관하 건물의 형태를 취하고,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두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이층 누각 건물이다. 비가 오는 중인대도 불구하고 홍인희 교수님의 열강은 계속 되었는데
온몸에 한기가 오면서 슬슬 꾀가나 한쪽 귀로만 듣던 중 선정비의 이야기가 나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정비중에 제일 으뜸이며 참된 선정비는 여수에 있는 탈루비라 한다. 단 세자이지만 이순신장군의 사후 6년이 지난후에 민초들이 세운 선정비로 그 분만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성웅 이순신... 나 역시 눈물이 난다.
-점심식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난 아무래도 불량학생인가 보다.. 비를 맞으며 열강하시는 교수님도 계신데 다음코스가 점심식사라 하니 내심 좋아 죽는다. “오~잉” 꿩고기를 넣은 만든 전골이란다. 출출하지는 않았지만 따끈한 국물에 속을 꽉 채운 만두전골은 참으로 맛있었다. 점심으로 몸을 따뜻하게 데운 우리는 고형산 묘역을 향해 또다시 공부할 채비를 하고 떠난다.
-고형산 묘역, 세덕사
고형산은 조선 중종때의 명신이지만 기묘사화때 남곤일파와 더불어 신진세력을 숙청한 이이기도 하다. 고형산의 묘역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홍인희 교수님의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첫 번째 이야기 속에 ‘망자에게 대관령길 넓힌 죄를 묻다’에 나옴으로 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책자에 나온 묘역사진을 봤을때는 돌보는이 없는 묘역인가 싶었다. 고형산은 강원도 관찰사로 각지역을 순방하다가 대관령길이 이인교 가마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것을 알고 사재까지 털어가며 수개월만에 사인교 가마 하나가 통과할 정도로 넓힌다. 그는 선정을 펼친 목민관으로서 조정에서 고위직을 거치며 76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그가 죽은지 100년이 훨씬 지난후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삼전도 굴욕’이라는 인조의 치욕스러운 항복이 있고 나서야 전란은 마무리 된다. 후일 청나라 군대가 한양을 조기장악 할 수 있었던 것은 고형산이 대관령길을 넓힘으로 인한것이라 하여 왕의 명으로 지하에 있던 고형산이 부관참시를 당하기까지에 이른다. 세월이 지나 그의 공적이 재평가되고 복권되어 위열공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횡성고씨 후손에게는 고향마을 십리 땅이 하사되었다고 한다. 악연은 꼬리를 물고 그 진부함을 떨치지 못한다. 기묘사화로 죽은 많은 원혼들이 악연의 끝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세덕사를 향해 발길을 옮기는 마음이 석연치 않다. 세덕사는 횡성조씨 중시조인 조영인 삼대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사당이다.
-횡성 삼일공원
세덕사를 거쳐 원주에서 40여분을 달려와 횡성군청에서 내렸다. 군청뒷편으로 형성된 삼일공원은 횡성군민의 자랑이요, 군민의 자부심이리라. 1919년 삼일운동 연장선에서 일어났던 횡성의 만세사건이다. 이 만세사건의 중심에는 그 시대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며 술집을 하던 김순이(일명 황소 아줌마)라는 천한 직업을 가진 여자의 활약이 무엇보다도 두드러졌다고 한다. 나라사랑하는 마음에 어디 빈부차별이 있을까!? 당시 수천에 달아는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였는데 20~80대까지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고 종교인, 유림을 비롯해 농민, 영세상인, 술집 주모, 점쟁이 등 거의 모든 직업군들이 모였다고 한다. 황소아줌마라 일컬어 졌던 김순이 열사는 해방이후 1952년 횡성지역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1990년 뜻있는 지역인사들을 중심으로 그녀의 애국혼을 기리기 위해 유실위기에 있던 묘를 수습하여 안장하고 횡성군민 일동 명의로 하여 <애국지사 ‘김순이 열사’의 묘>로 받들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어 횡성 군수님의 횡성군에 대한 소개와 답례가 있었는대 군민 4만여명이라는 말에 뜨악해졌다. 서울에서 가까운 안양이 고향이고 결혼하여 지금까지 서울에서만 살아온 나는 인구밀도에 대한 생각을 하니 좀 쓸쓸해졌다. 여러 잡곡이 담긴 답례품을 받으면서 괜히 미안하고 부끄럽고 미안한건 왜일까? ‘횡성에 와서 살까!?’ 다시 홍인희 교수님의 열정이 담긴 강의가 있었는데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첫 번째 이야기 113페이지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경기도 사람 경중미인인데 거울 속 아름다운 여인과 같이 겉은 화려하고 좋으나 실속은 그다지 없다고 평한 ‘정도전’ 맞다! 맞어!? 다른이는 몰라도 나는 그렇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횡성 자연 휴양림에 도착하니 어둠이 나를 감싼다. 안개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언덕마을 5호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대 통나무집 창문에 어리는 노란 불빛이 따뜻하다. “어쩜 집들이 저리도 예쁠까!” 몇 년후 서울을 떠나 저런 집에서 살려고 했는데.. 내가 꿈꾸던 집이다. 열심히 벌어서 세금 또한 많이 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저렴한 비용으로 훌륭한 선생님과 함께하는 역사탐방 공부와 식사.. 거기다 이렇게 멋진 숙소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닫는다.
둘째날 11월29일 토요일
오늘의 스케줄은 이렇다. 건등산-견훤산 성지-홍원창-점심식사- 이달시비-임경업 추모비- 법천사지
-건등산
건등산에 오르니 손곡 이달이 지은 원문과 함께 해석이 새겨져 있는 시문이 있다. ‘길 위의 인문학’ 타이틀이 주는 함축성있는 이 메시지를 이제 깨닫는다. 홍교수님이 비문에 새긴 해석보다 그때의 손곡 이달의 마음이 되어 해석을 해주는데 그 당시는 알아들었건만 기록을 안했으므로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녹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견훤산 성지를 가는길에 다다르니 어느 시골의 야트막한 산길을 걸어올라 가는 듯 하다. 눈여겨 보는이 없고, 알고서 오지 않으면 도저히 그 옛날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두고 싸운곳이라 할 수 있을까 싶다. 덤불에 덮힌 비문하나에 글씨마저 희미한채 여기가 견훤과 왕건이 싸우기 위해 쌓은 성이구나를 가르키는 표지석 하나가 초라하게 있다. 시공을 초월한 천년세월 피맺힌 한이 가시덤불과 알 수 없는 넝쿨들이 되어 우리앞을 가로막는 듯 하다. 올라가보니 그 옛날 산성을 쌓은 돌무더기들이 천년세월에 풍화되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이곳은 건등산과 마주보고 있는대 그 거리가 4km즘 된다고 한다. 전설인지 사실인지는 모르나 견훤의 군사와 왕건의 군사가 활을 당기면 건등산으로 견훤산성으로 오고갔다고 한다. 치열한 싸움 끝에 왕건이 꾀를 내어 견훤성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여 군량미 조달을 막고, 취병산을 휘감아 도는 섬강을 막았다가 일시에 풀면서 횟가루를 풀어 뿌옇게 흐르게 했다고 한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견훤의 병사들이 쌀뜨물이 흐르는줄 알고 마시고 죽는 바람에 결국 왕건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다. 결국 왕건은 승리의 미소를 띄우며 고려 500년 역사의 초석을 다진 것이다. 산성을 내려오는대 “여기는 뱀이 많습니다” 라는 홍교수님의 말에 놀라 흠칫 했는대 “그런데 사람은 물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 “휴~ 다행이다” 그때 몰살당한 견훤 병사들의 혼이 뱀에 투영되어 물지 않는다고 한다.
-흥원창
다다른곳은 은섬포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기 여주의 여강, 충북 충주의 남한강, 강원 원주의 섬강 물길이 만나는곳에 자리한 삼합지점이며, 수운이 주요 이동수단이던 시절 남한강의 도도한 흐름을 따라 강원도 남부지역과 동해안의 십여개 고을에서 거두어 들인 온갖 물자들을 서울의 경창으로 운반하기 위해 보관해 놓던 조창(흥원창)이 자리에 있었으니 교통의 요지요, 물류의 집산지 였다 한다. 당시 이곳에는 벼 이백섬을 실을수 있는 평저선 21척이 운영되고 있었다 하니, 운송량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법천사지
법천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크게 융성한 사찰이다. 지강국사 혜림이 초년에 수확하고 말년에 입적한 곳으로 현재는 탑, 비, 불상, 광매 등등 석재로 만들어진 유물들만이 남았다. 한창 융성할 때에 이만평의 터에 십구채나 되는 건물이 있었으며, 기거하는 인원이 수천명에 달해 밥지을때가 되면 절앞 개천이 허연 쌀뜨물로 뒤덮여 남한강으로 흘러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지광국사 현묘탑과 탑비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때에 오사까로 몰래 반출되었다가 되돌아와 현재는 경복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탑비는 법천사지에서 찾아 볼 수 있는대, 이 탑비는 높이가 무려 4.55m나 되며 고려시대 석비의 특징을 아름답게 조각하였으며 당초문 조각과 쌍용조각으로 탑비 고유의 특징을 살렸다. 탑비의 비문은 정유산의 지광국사의 공적을 추모하여 지은글을 안민후의 글씨로 써넣은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달시비, 임경업 추모비
손곡리는 손위실이라고도 한다. 고려의 마지막왕인 공양왕이 공손하게 왕위를 물려주고 온 곳이라는대서 유래된 지명이다. 이곳에 손곡 이달의 예맥요라는 시비가 있고 그 옆에 임경업 추모비가 있다. 손곡 이달은 원주 손곡 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최경창 백광훈과 더불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이라고 했으며 이달은 서자였기 때문에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했지만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적서의 차별이 심하던시절 신분제한에서 생기는 울적한 심정과 가슴속에 간직한 상처를 기본 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시어를 사용했다 한다. 홍교수님의 말로는 ‘송시는 머리로 올리는 시요. 당시는 가슴으로 울리는 시다’ 라고 가르켜 주시며 당시 이달은 유행인 송시를 배우고 정사흥으로부터 두보의 시를 배웠다. 그러나 박순은 그에게 시를 가르키면서 “시도는 마땅히 당시로서 으뜸을 삼아야 하며, 송시는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다”라고 깨우쳤다. 그의 문하로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도 그에게 시문을 배웠다 한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에 이달이 지은 ‘별이 예장’을 대표작으로 꼽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오언절구는 유명했다.
그 옆에 임경업 장군의 추모비가 있다. 시대의 격랑에 희생된 용장 ‘임경업’.. 임경업은 의리와 지조를 금과 옥조로 여기는 전형적 무인이자 철저한 친명 배금주의자 였다. 명의 황제로부터 사만군사를 이끄는 평노장군 벼슬을 받은후 일시 망명생활까지 했다.
임경업은 당시 친명반청의 사회분위기와 함께 우국충정의 뛰어난 충신이요, 무장이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장수였다. 명성을 떨치면서도 한번도 청나라와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한 불운의 명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에는 당시의 국민이나 감정과 함께 충의지조, 용기 등으로 점철되어 민족의 마음속에 자리했으니 뒤에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이 널리 읽혀졌던것으로도 알 수 있다.
-탐방을 끝내며
처음으로 참가한 ‘길 위의 인문학’은 아쉽게도 오년여를 진행해오다 이번 탐방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고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가한 이번 탐방으로 많은 것을 얻고 떠나지만 또 새로운 탐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리라 믿으며 함께 해 주신 관계자 여러분과 탐방의 진행을 맡아주신 진행자에게 감사드린다. 비가 오는 중인대도 열강을 해주신 홍인희 교수님을 나름 적어본다. 강원도 원주가 고향이신 교수님은 강원도 사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신 것 같다. 첫사랑의 미로를 찾듯 잃어버리고 스쳐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찾아 알아내어 배우고 갈고 닦아 우리에게 열정으로 몸을 사르며 가르키신다. 사랑이 그렇지 아니한가. 관심이며 알고 싶고, 배우고 싶고, 깊게 호흡하고 싶은 강원도 산하에 면면히 숨어있는 역사의 비의와 신화와 전설을 찾아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 역사 사랑의 애착이며, 향토 사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며 표현이리라. 사랑 그 이름으로 열정으로 가르키는 그분을 보며 박수와 갈채를 아낌없이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