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14-11-16
조회 : 6991
작성자 : 박종세
저서 『과학 삼국유사』에는 ‘과학’이 있었다.
2014년 11월 14~15 양일간 ‘과학으로 보는 우리역사’ 탐방을 위해 경주 일원을 다녀 왔다. 필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역사에 왜 과학자가 그리고 과학이 그리도 없었는가 하는 것이 큰 의문이었다. 어렸을 적에 접한 역사 교과서에는 우리의 과학 이야기가 너무도 빈약했다. 게다가 교과서에 나오는 과학 이야기는 그 설명이 너무도 평범했다. 이런 내용의 과학 이야기는 어린 나이임에도 마음속에 대단한 긍지가 생기거나 자부심을 충족 시키지 못했다. 또 우리의 과학은 이론의 발견은 없고 모두가 유물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10대 때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인데 내 머리 속에 선명하게 각인 된 얘기가 딱 하나 있다. 어느 시대인지 누구였는지 이름도 기억은 없지만 왠지 그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 과학자가 ‘타서 없어지는 촛불’을 들여다 보다가 발견한 ‘물질불멸의 법칙’이 우리나라가 서양보다 훨씬 앞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그뿐 다시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마침 이 글을 쓰면서 한국사D/B인 <한국사콘텐츠(http://contents.koreanhistory.or.kr/main.do)>를 뒤져 봐도 없다. 결국 내가 어려서 배운 교과서의 내용이 틀린 이야기인지 그 진위를 알 길이 없다.
그 다음에 접한 것이 학창시절을 한참 지난 후KBS의 역사스페셜 등 방송 기획프로그램을 통해 본 우리의 가슴 뿌듯한 과학 이야기였다. 가야의 제철기술, 신라의 금세공, 방짜유기와 봉덕사 종(에밀레 종) 주조기술, 천 년을 견딘 불국사의 석축과 두 탑, 우리가 손 대기 전까지 천 년 세월을 뽀송뽀송하게 유지해 온 석굴암의 제습기술, 종이와 도자기 기술 등등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이들 내용이 자라는 학생들이 배우도록 역사교과서나 과학책에 왜 올라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은 계속 남았다.
그 후로 접한 것이 ‘학문간의 통섭’, ‘학문간의 융합’이라는 최근의 화두였다. 그러나 이 화두도 그 의미는 알겠는데 내 머리 속에 ‘번쩍’하는 명쾌한 개념을 정립해 주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종호 교수의 『과학 삼국유사』를 읽고서야 내 머리 속의 안개가 걷혔다. 책에서도 언급이 되었듯이 “왜 우리 유산에 과학이 없다고 느껴지는가?”라는 길고 긴 내 의문이 풀린 것이다.
이 교수의 책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 된다. 1959년 영국의 C. P. 스노우는 유명한 케임브리지대학교 리드 강연에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단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각하게 경고한바 있다. “두 문화(two cultures), 즉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간극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주된 방해물이 된다”는 것이다. 스노우가 강조한 것은 두 문화의 극점에 물리학자와 문학자가 있는데, 이들이 대화를 한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서로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Eureka! 이제야 알겠다. 과학을 모르는 역사학자가 역사책에서 과학을 다루고 인문학을 모르는 과학자가 가슴에 와 닫는 글을 쓸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과학을 모르는 역사교사가 역사 속의 과학을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그 동안 실감이 나지 않던 ‘학문간의 통섭’, ‘학문간의 융합’에 대한 개념이 내 머리 속에 선명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이만영 전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은 이 책을 “이종호 교수의 『과학 삼국사기』와 『과학 삼국유사』는 저자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여러 번 통독하면서 찾아 낸 과학관련 사실들을 동서양 근·현대의 사례들을 통해 비교 설명하면서 독자들에게 아주 쉽게 다가가고 있다”고 평했다. 박택규 건국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이 책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두 문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융합을 이루었다”고 했고, 신형식 서울시사편찬위원회위원장은 “이 책의 미덕은 과학자가 역사서를 분석하면서 역사학자들이 놓치기 쉬웠던 과학적인 내용을 읽어 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과학기술원(KIST;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해외유치과학자로 귀국한 그는 프랑스 페르피냥대(Université de Perpignan)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은 데 더하여 프랑스의 과학국가박사학위도 받았다. 과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동서양의 고전들을 섭렵하고 많은 세계유산들을 직접 답사했다. 과학자이면서도 인문학 소양을 겸한 저자는 문명·과학·역사를 넘나들며 많은 저술활동을 했다. 그의 학문은 통섭과 융합의 전형인 셈이다. 이 책은 한국과학창의재단으로부터 ‘우수과학도서’로 지정되었다.
저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과학 관련 사실들을 추려 내어 동서양의 전거와 과거와 현재의 사례들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해박한 과학이론으로 우리 과학을 설명한다. 이 책은 삼국시대 역사서에서 여러 분야에 걸친 우리의 과학을 찾아 심층 분석한 것이기에 당연히 '한국과학사'이기도 하다. 책은 선덕여왕의 총기, 막걸리, 포석정, 로봇이야기, 온돌, 용, 소리개 통신원, 앵무새의 사랑, 차, 사리이야기, 첨성대, 불국사, 석굴암 제대로 보기, 에밀레종, 석빙고, 가마솥, 김치, 국물 문화의 주인공 장, 사발의 기원과 방짜의 진수 징, 바둑 등 모두 20가지를 키 워드로 우리 삼국시대의 과학을 재미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저서 내용 중 이틀 동안의 경주 일원 탐방과 직접 관련이 있는 과학 이야기는 포석정, 부처님 사리, 첨성대, 불국사, 석굴암, 에밀레종, 석빙고 그리고 월지(안압지)였다. 그 중에서도 포석정 불국사 석굴암 에밀레종 석빙고는 압권이었다. 책 읽기를 통한 과학적 측면의 새로운 지식을 얻기는 KBS-TV의 ‘역사 스페셜’ 이후 처음이었다. 이종호 교수의 저서에는 채 제목 그대로 유리가 유념해야 할 과학이 있었다.
사전강연과 탐방 현장해설에서는 과학이 없었다
사전 강연에서 이종호 박사는 우리 역사유산을 과학적 측면에서 제대로 보자면서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유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과학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자학적 판단을 하고 있는데 대해 그것은 과학자가 아닌 비 전문가들이 우리 역사를 보는 비과학적 시각일 뿐 우리 역사 유산에도 우수한 과학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현장 설명에서는 과학이 없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참가자들이 권장도서인 『과학 삼국유사』를 모두 읽고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알고 과학적 측면의 구체적 설명을 생략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필자는 사전강연과 현장설명이 생략된 우리의 유산에 대한 구체적인 과학적 설명은 책을 읽은 지식으로 돌리려 한다. 단 필자는 우리가 방문했던 현장 중에서 ‘황룡사지’와 ‘석굴암’ 두 군데 방문소감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 불국사를 방문했을 때 운이 좋았다. 마침 석가탑을 해체 수리하느라 탑신에 보존 중이던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일반에 공개 전시를 하고 있어 이를 친견할 수 있었다. 평생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였다. 사리는 46과였다.
[황룡사]
필자는 2011년 8월 26일에도 황룡사지를 방문했었다. 찾을 적마다 내 눈앞의 폐허는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해 황룡사지를 다녀간 뒤 나는 아래 내용의 탐방기를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작년 4월 26일 탐방 때도 황룡사지를 찾았다. 2011년 때 느낀 감회 그대로였다. 아니 4대왕 93년에 걸친 대역사의 탄생물인 호국의 대가람 황룡사를 지켜내지 못한 나약한 우리역사를 생각하면서 오히려 더 안타까웠다. 2011년의 방문소감을 아래에 옮긴다.
(전략) 황룡사와 인각사 두 군데에서 나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얻었다. 황룡사 폐허의 그 황량함, 쓸쓸함, 허전함. 애잔함, 아쉬움~ 인각사 보각국사 비가 보여주는 야차 같은 잔인함, 허망함~. 나는 황룡사 터와 인각사 두 곳에서 깊은 자책감, 탄식, 회한을 느꼈다. 문화는 그것을 창조하고 보유하고 기리는 사람들의 정신이고 정체성이다. 문화는 포괄적이고 총체적 개념이다. 시 한 수, 그림 한 폭, 조각 한 점이 문화가 아니다. 그것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숙성된 것이 문화다. 벽돌처럼 쌓이되 온전히 보존되어야 하고 온전히 보존되되 방치되지 않고 기리고 전수되어야 한다. 파괴되고 소실되면 상처(흠집)로 남을 뿐 산 문화로 역할 하지 못한다.
나는 황룡사 터와 인각사의 ‘보각국사 비’ 잔해에서 우리문화의 깊은 상처를 보았다. 그리고 그 상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참혹하고 슬픈 응어리로 내 마음속에 옮겨 들었다. 마른 눈물에 ‘헉~!’ 하고 억장이 무너졌다. 엉뚱한 종족이 쳐들어 와 그 웅장한 황룡사를 그리도 알뜰하게 태워 버리게 놔둔 것도 못난 우리이고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든 보각국사 비를 그처럼 깡그리 산산조각 박살낸 것도 우리 자신이다. (후략)
[석굴암]
석굴암은 1962년 12월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석굴사찰이다. 석굴암의 불행은 1907년 한 일본인 우편배달부에 의해 발견 되면서 시작 되었다. 그 일본인 우편 배달부는 우연히 입구가 허물어진 석굴암을 발견했고 이 사실을 일본 통감부에 알린 것이다. 1909년4월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다녀 가고 세키노 다다시라는 일본 학자가 다녀 가면서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비견할만한 것이 없는 엄청난 문화재”라고 평가했다. 일본인들이 다녀간 이 무렵에 본존불 뒤쪽 11면 관음상 앞에 있던 5층 소탑이 감실에 있던 작은 석상 2점과 함께 일본으로 밀반출 되었다. 당시의 여러 진술과 정황으로 보아 부통감 아라스케가 가져간 것으로 추정 된다고 한다.
그 후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조선총독부가 석굴암을 통째로 일본으로 가져가려 획책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하자 포기했다. 이 후 일본은 세 차례 석굴암에 손을 댔다. 1913~15년 3년간 완전 해체 후 조립했는데 누수현상이 생기자 1917년 돔(지붕) 수리 등 몇 군데 부분 수리를 했다. 2차 수리에 효과가 없자 3차로 1920~23년 내·외부를 수리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못 했다. 1000여 년을 습기에 문제가 없던 신라의 과학이 망가진 것이다.
정부 수립 후에는 석굴암 보존문제가 계속 거론되다가 1963년 7월부터 1965년 6월까지 대대적 보수를 하게 되는데 일본인들이 돔을 콘크리트로 덮어 버린 것을 원래의 석물을 손상하지 않게 떼어 낼 방법이 없자 누수를 막는 고육지책으로 돔 위에 다시 돔으로 덮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1966년부터는 대형 제습기를 가동시키다가 아예 유리 막으로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상은 되돌릴 수 없는 슬픈 역사다. 이제 와서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필자는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우리 국보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을 감상하려 매일 구름처럼 인파가 모여든다. 우리 국민에게도 못할 일이지만 특히 외국인들에게 지금의 석굴암은 차마 낯이 뜨거워 보여주기 민망하다는 생각이다.
첫째 석굴암 수광전 주변에 스테인리스 프레임(stainless frame)을 덧붙여 놓고 프라스틱 유리를 끼워 놓은 공사는 서민가정 베란다 유리창도 그렇게 만들지는 않을 정도로 품위 없고 조잡하다. 무엇보다 우리 고건축과 스테인리스 프레임에 플라스틱 유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둘째, 수광전 앞 바닥 면은 콩크리트로 깔아 놓고 출입을 막느라 금줄을 쳐 놓고 있다. 그 모습이 어느 도시 판자촌 장면을 연상케 한다.
셋째, 무슨 공사를 하려고 그러는지 수광전 아랫단에는 컨테이너(현장사무소?)까지 가져다 놓은 모양이 그리도 꼴불견일 수가 없다.
넷째, 외국인 관광객이 세계문화 유산이라고 찾아 왔는데 북적대는 내국인 관광객 틈에 끼어 유리 차단 막이 얼비쳐 잘 보이지 않는 석굴암 안쪽을 몇 번 기웃대다가 계속 밀고 들어 오는 인파에 밀려 나갈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비싼 관람료 내고 몇 초나 몇 분만에 허망하게 관람이 끝나게 된다. 외국인 관광객들로부터 “한국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관람은 사기다”라며 항의와 불만토로가 아직까지 없는 것이 이상하다.
해결책은 세 가지다. 첫째, 이집트가 나일강 댐 건설로 수몰될 위치에 있던 아부심벨 신전의 경우처럼 결로문제 등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을 유네스코와 협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내 기술진으로 부족하다면 유네스코의 협조를 얻어 세계적인 전문가를 동원하여 연구하고 문제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하는 것이 최상의 대책이다.
둘째, 첫째 조치가 시작되기 전 까지는 석굴암과 그 주변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다운 수준으로 주변을 조성할 때까지 관람을 잠정 중단하는 것이 차선의 대책이다.
셋째, 첫째 조치든 둘째 조치든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는 관람객을 무조건 밀어 넣지 말고 10명 이내의 인원으로 그룹을 만들어 그룹마다 해설자가 인솔하면서 해설(외국인은 외국어로 해설하던가 해설 녹음기를 대여함)하되 그룹간의 시간간격은 해설 소요시간에 그룹 전원이 석굴암 내부를 충분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을 합한 시간으로 하는 것이다.
어떤 조치가 있던 간에 지금과 같은 모습,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의 관람은 나라망신이다. 문화재관리 당국의 현명하고 신속한 조치를 촉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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