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후기그 날의 낭만과 감동을 함께 나누어요.

  • 만해 한용운의 시 세계로 들어가 본다. ~ 횡설수설 ~

    만해 한용운의 시 세계로 들어가 본다. ~ 횡설수설 ~

    만해 한용운의 시 세계로 들어가 본다. ~ 횡설수설 ~   만해 한용운이 속한 문학세대는 어땠을까 ? 그 시대의 문학가들은 평균수명 40세에서 20대 정도의 세대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만해는 당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지만 기념비적(game changer)으로 시집; “님의침묵1926”,이 발표되었다는 도서관강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강사 유성호 교수님은 "인문열차 삶을 달린다" 속에서 만해의 세계를 제시한다.   언어란 무엇인가 ? 우리에게는 남는 언어로 기억될뿐 실제 이루어지는 그 삶 자체는 이미 지나감으로써 휘발성이 있다. 다만 그의 작품 내지 그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자에게는 그 언어형식이 매개체로 되어 당해 환경과 의미가 더 기억될 것이다.   여기서 언어 기록의 중요성을 생각해 본다. 개인 내면의 고백내용을 알지 못하는 말과 그 내용을 기재한 사람들에게는 이후 기록매개체에 의해서만 떠오르는 기억이 의미를 가질수 있다. 따라서 현대에는, 예컨대 유명한 이육사에 대해서는 혁명가로서 역사학자들은 보지만 일반 시민들은 기록매체의 영향으로 시인으로서 문학가를 알고 있을 뿐이다. 한편 오늘날 언어기록매체 수단중 유튜브 등의 SNS수단의 기록도 기념하는 것을 전해주는 중요성을 고려 했지만 한계가 있다. 그 중요한 부분으로는 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삶 속에서 반복되는 기록은 내면화된 언어의 용어가 되므로 꺼리낌없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삶 속에서 언어 예컨대 인연 십자가 같은 용어와 같이 내면화되지만 실제로는 기록매체나 기억된 분야에서 쓰고 있을때에 그 의미가 중요하다.   [ 나룻배와 행인 ] 나룻배에 강요하는 행인이라는 시(poem) 세계의 구조를 보면 어떨까 ? 나룻배는 어떤 일 또는 서비스와 물건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대체로 수동적일 수 밖에 없어 불만을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너(행인)에게 맡긴다는 불가피한 침묵속으로 가고, 행인은 나룻배에 대해 주체적으로 불가역 명령을 주는 침묵에서, 과연 공통 상식과 정의가 제대로 있는가 ? 나룻배와 행인은 헛되이 덧 없음이 가는 길에 서있는 관계일수 밖에 없을까 ? 나룻배와 행인간 관계의 고유구조를 틀어서 본다면 사회조직속에 구성하는 각각의 큰 프레임 안에 갖혀서 뭐라고 부르지만 각 개인은 큰 프레임에서 밖으로 경계를 넘어 나가서 놀고 있을 뿐이다. 그저 놀다가 프레임에 오든 안 오든 멀리 떠나든 그저 정적으로 지켜만 보는 공간존재일뿐일까,,,,  [알 수가 없어요] 님은 알 수 없어요? 그 시선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공간(스페이스)으로 본다면 스페이스 속에서 개개인은 특별한 모습으로 투영되는 관계로 존재한다. 그 모습은 알 수 없어요 란 표현이고 뒤집어 말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다라는 정도 범위 내에서 우리가 선택 결정을 하게 된다. 그 선택 결정은 화성으로 잠깐 사라지지만 그것을 기록하고 암기한다면 알 수 없다는 그것이 구체화되는 실제적으로 기대하고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임선규 2018.09.20

  •  오송역, 경주 그리고 KTX ..

    오송역, 경주 그리고 KTX ..

     경주 가는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오송역도 처음 가본다. 늦을 까봐 서둘러 출발 했던 것이 너무 일찍 왔나 보다. 열차가 도착할 때까지 1시간이 넘도록 기다려야 했다. 처음 타보는 KTX 였다. 1시간 20분 걸려 신 경주역에 도착했다. 대합실에서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이 도착 하기를 기다린다. 얼마쯤 지나자 서울에서 출발한 일행과 합류를 했다. 버스 두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처음 간 곳은 박목월 생가였다. 생가는 원래 있던 자리는 아니고 복원을 했다고 한다. 생가를 둘러 보면서 박목월 시인이 남기고간 자취를 살펴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동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가 박목월 시 였다는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경주는 구름만 가득해 보일뿐 비는 오지 않아서 다행 이었다.  불국사가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 메뉴는 쌈밥 이었다. 신선한 야채에 불고기를 쌈 싸 먹는다. 고등어 구이도 있다. 맛있게 먹었다. 경주가 관광지라서 음식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그런 걸까? 분위기도 좋았고 서비스도 친절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김동리 박목월 문학관으로 이동을 한다. 김동리와 박목월은 생전에 서로 친하게 지냈다 한다. 그런 의미로 문학관도 한 건물 안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문학관 내부를 둘러 보며 소설가 김동리와 박목월 시인을 생각해 봤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을 한다. 준비해간 우산을 펼쳐야 했다. 인근에 있는 불국사 까지 걸어서 갔다. 불국사의 장엄함은 천년 고찰 다웠다. 말로만 듣던 청운교 백운교도 가보고 불국사 내에 있는 다보탑 석가탑도 가봤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연등이 화려하게 보였다. 비 때문에 많이 둘러 보지 못한게 한편 아쉬웠다. 아주 굵고 쭉쭉 뻗어 있기도 하고 멋 드러지게 자란 소나무가 인상적 이었다. 수 백년은 나이를 먹었을것 같았다.  옥룡암으로 향했다. 이육사 시인이 잠시 묵었던 곳 이라고 한다. 작은 암자 였지만 큰 바위에 불상이 많이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바위에 아름다운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신라의 찬란했던 불교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는것 같았다. 일일히 사람 손으로 한 거였을 것이다. 경주 월성으로 이동을 한다. 월성은 신라의 궁궐 터가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궁궐터 였으니 각종 유물도 많이 나왔을 것이다. 그 흔적만이 고스란이 남아 있었다.  예기소(금장대)로 발 길을 옮긴다. 예기소는 김동리의 대표작인 무녀도(을화)의 작품 배경인 곳이라고 한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가장 가까이에 근접했을 정도로 무녀도는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금장대 누각에 올라가 봤다. 호수가 보이고 그 멀리로 경주시 전경이 한 눈에 보인다. 바로 밑에 있는 암각화가 있는 곳에도 가 봤다.  날이 많이 저물었다. 신 경주 역에 이르고 서울에서 온 일행들과 헤어졌다. KTX에 몸을 실었다. 오송역에 도착 했을 때는 어둠이 짙어질 무렵 이었다. 비는 아직도 여전했다. BRT 버스를 탔다. 전용 도로인 BRT도로를 쌩쌩 달린다. 우산을 썼는데도 빗물이 바닥을 치고 옷 깃에 스며 든다. 사는게 재미가 없어질 때면 오늘 처럼 훌쩍 떠나 보는게 필요한듯 싶다. 뿌듯함을 얻게된 기분이다. 뿌듯함 그것은 곧 행복감 이기도할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살아가 보자.

    강형기 2018.05.16

  • 경주가 품고 있는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서

    경주가 품고 있는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서

          <경주가 품고 있는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서>                              <여        는         글 > 한주간의 미세먼지와 황사를 깨끗이 씻어줄 봄비가 차분하게 내려 말갛게 단장한 수목들의 녹색 향연이 더욱 싱그럽고 고운 아침이다. 길을 나서는데 비가 와서 조금은 번거로움도 있지만 아쉽게 가려고 하는 봄의 정취와 새들의 합창으로 배웅 받으며 모임 장소로 갔다. 오랜만에 코드가 맞는 친구와 동행하여 신중년의 일상에서 벗어나서 인문 열차을 타고이번 탐방의 주제인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 천년 고도의 경주로 떠날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길을 떠나면 항상 느끼는 오밀조밀한 우리 산야는 애미품 처럼 포근하고 따뜻하게 품어 주어 편안한 정겨움이 나른한 행복감으로 다가와 외국여행과는 또 다른 익숙함이더 좋은것은 나이 탓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도란도란 정겨운 일행들의 이야기 소리들과함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감상하며 오늘도 어떤 역사적 사실과 인문적 비의를 통해 보고, 듣고, 느끼며 교감할 것인지를 기대하며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이 녹아 있는 김동리 작가와 박목월작가의 모향인 경주로 향했다. <자연과의 교감과 향토적 서정의 우리 전통적인 율조를 살린 청록파시인 박목월 생가> 신경주역에 내려 역 광장에 나오니 광장 앞에 큰 무덤이 있고 덕천리 유적들을유리 박스안에 설치 된것을 보니 경주는 모든 곳이 박물관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박목월 생가로 향했다. 우리에게 청록파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목월 시인 생가로 가는 주변에는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과 이미 모내기를 한 논들의 모습들이 정겨웠고 흐린 날씨이지만 봄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시인의 [나그네]라는 시에 나오는 시어중 밀밭 길을 생가 조성할 때 심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청록파 시인의 한사람인 박목월 (본명 박영종)선생은 1915년 1월 6일 경북 경주군 서면모량리 571먼지에서 아버지 박준필씨와 어머니 박인재씨 사이에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인의 살던 어린 시절은 삶이 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시인의 유년시절은 부친이 수리조합장을 지내셔서 나름 유복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아마도 그래서 그런지 시인의 시를 보면 서사적인것보다 자연적과의 교감과 향토적 서정의 세계, 우리의 전통적인 율조여서 그런지 편안한 마음으로 음미할 수 있는것 같다. 이곳 생가는 박목월시인이 유년시절을 보낸 장소로서 시인의 대표시 [윤사월]이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쓰여진 시이다. 우리 또한 이 시와 계절적으로 같은 시기에 와서 보니시의 향기에 취해서 서정적으로 더욱 공감이 가고 정겨웠다. 청록파 조지훈의 시 [완화삼]과 그에 대한 답시로서 시인의 [나그네]가 경주에서 탄생한 일화는 경주를 문학의 도시로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생가로 들어서니 시낭송장이 있었고 초가로 만든 생가는 어릴적 고향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토담 옆으로 피여 있는 알록달록한 작고 예쁜 패랭이 꽃들과 집안 화단에 피어 있는 보라와 흰색의 매발톱꽃이 앙징맞고 귀여웠다. 사랑채 옆으로 장독대가 정겨운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고 나뭇가지로 만든 발로 출입구를 만든 변소는 우리 어릴적 모습 그대로여서 향수를 자아냈다.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검정색과 흰색 고무신이 옛스러움을 더해 주고 집안의 방앗간 구실을 해주었던 디딜방아도 정겹기는 매한가지였다. 맷돌과, 지게, 소쿠리, 박바가지등 옛조상들이 쓰던 생활용품들이 잘 구비되어 있어 마치 민속박물관에 온것 처럼 정겨움을 자아냈다. 잠시 시인의 시어 중에 나오는 ‘나그네’를 본따서 지은 정자인 ‘나그네정’에 앉아서 시인의 아름다운 시 이 계절에 탄생했을 [윤사월]을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을 보면서읊조려 본다. 하늘과 자연과 들길을 벗삼아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 나갔셨을 시인은오른손에 펜을 끼고 두 팔을 가슴에 모은 채 저 멀리를 응시하는 시인의 배웅을 받으며 아쉬은 생가를 뒤로 하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유정쌈밥집으로 향했다. <20세기의 경주에서 뿌리를 내린 목월과 동리의 삶과 문학 기리는 동리, 목월 문학관> 경북 경주시 불국로 406-3 진현동에 자리잡고 있는 [목월.동리 문학관]은 경주출신으로 현대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김동리 선생과 박목월 선생의 예술업적과 유품을 전시하고 두분의 삶과 문학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혼미한 격변기에 우리 순수 문학을 굳건히 지키고 휴머니즘 문학의 근간을 이뤄 나간 김동리 선생과 토착 정서와 민요가락을 시와 음악으로 승화하여 전국민으로부터 ‘국민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박목월 시인을 기리기 위해 경주시와 (사)동리,목월기념 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2006년 3월 24일에 건립한 문학관이다. 이 곳은 특이하게 한 건물안에 좌.우 대칭으로 사이좋게 정문에서 우측이 목월선생님의 문학관이고 왼쪽이 김동리 선생님의 문학관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문학관에는 김동리와 박목월 선생의 일대기와 작품들이 있다. 각 관마다 두분의 창작활동을 했던 공간을 재연출하여 작품 탄생 과정에 담겨 있는 정신과 정서를 느껴 볼 수 있다. 김동리는 박목월보다 세 살 위이고 대구 계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서울의 경신학교로 전학해 박목월의 중학교 선배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서울의 경신학교에 다니던  김동리가 휴학해 경주로 내려와 있던 1934년의 겨울방학 때였다. 1935년 이후로 김동리의 소설이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이는 박목월에게 두가지 의미을 가지게 하였다.하나는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상대역이 될 수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문학적 성장의 촉발자의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다. 두분은 경주 출신으로 한국문단의 양대산맥을 이룬 거봉들로서 향토적 서정과 샤머니즘을토대로 민족문학을 세계화한 작가들이다. 이 두분을 기리고 유능한 문학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동리,목월 문학상을 추진하게 되었다. 매년 동리.목월문학관에서는 동리목월 백일장, 동요경연대회등 다양한 문학제를 펼친다. 박목월 선생님의 문학관에 들어서니 선생님의 흉상이 우리를 맞이했다. 자연지향의 시를 쓰신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자연과의 교감과, 향토적. 서정의 세계, 우리의 전통적인 율조를 살린 시를 써서 매우 절제된 언어로 자연을 노래했으며 짙은 서정성과 한국어의 리듬을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민요의 가락을 살린 그의 동시와 향토적 서정시 [송아지],[뻐국기], [흰구름],[청노루],[윤사월], [나그네], [그리움]등은 국민 모두가 즐겨 읽는 시로 알려져 있다. 국민들에게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받고 있는 그에게 붙여진 ‘국민시인’ 이란 칭호는 매우 적절한 것 같다. 그의 시 세계를 들여다 보면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뉘는데 초기 시는 자연의 교감과 향토적인 정서를 배경으로 하여 본원적인 고향을 추구하는 시편들이다.[윤사월], [청노루],[나그네], [산도화],등이 그의 초기 시중 가장 애송되는 시들이다. 맑고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순수한 정서로 창작된 그의 작품들은 가장 압축된 시 형식속에 무한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어서, 독자들을 사로잡는 특이한 시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는 우리의 전통적인 율조와 조화됨으로써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는말을 듣고 있으며 어린애와 같은 동심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시인들이가지지 못한 독특한 개성적 톤을 발성한다. 초기시에 해당하는 [청록집]과 [산도화]에 실린 작품들은 자연의 풍경을 서경적으로 묘사 하는 듯하면서도 서정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박목월 선생님은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단순히 그것을 베끼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 한 연에 포인트를 두어 독자의 시선을 유도함과 동시에 시인의 감정의 핵심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중기의 작품인 [난.기타], [청담],에서 목월은 초기의 자연 친화에서 벗어나 인간생활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시들은 시인의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뿐아니라 시인 자신의 일상사를 소재로 하고 있어 초기 시들 [가정], [밥상앞에서]과 대비를 이룬다. 그의 중기 시와 후기 시는 인생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문명비평적 경향등은 시가 시대적인 상황과 독자와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소재를 찾아 거기에서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현실적인 자연과 교감하여 시적 아름다움으로 승화하거나 문명비평적인 관점에서 형상화한 시들이다. 후기의 [경상도의 가랑잎]에서 인생에 대한 시인의 애정은 고향에 대한 향수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며 군데군데 경상도 사투리를 끌어들임으로써 구수하고 소박한 감각을 살리고 있다. 말년에 작품에 해당하는 [무순]에서는 이러한 인간적인 회한이 사라지는 대신 대상에 대한 관조적이고 담담한 태도가 돋보인다. 고인의 육성으로 낭송되는 시의 여운을 뒤로 하고 두분이 문우이면서 경주 문학의 토대를 이룬 김동리 선생님의 문학관으로 이동했다. <소설[을화]로 노벨문학상 본선까지 오른 가장 한국적인 작가 김동리> 작가 김동리 선생님은 1913년 11월 24일 경주시 성건동 186번지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김창귀이고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작가는 서적을 스승으로 삼아 지식욕을채워갔으며 그가 중학교 4학년이던 시절에 철학서적과 세계문학, 동양고전에 심취하였고[화랑의 후예], [산화]를 통해 조선 동아 중앙일보에 당선되면서 결실을 이루었다. 경주는 고조선 이후의 무속적 분위기에 통일 신라의 불교가 접목되어 형성된 독특한정신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원천적 민족정신은 변하지 않고그대로 이어져 경주 곳곳에 남아 있다. 김동리가 자란던 때 경주는 신라 고도의 옛 분위기가 훼손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간직하고 있었다. 토속적.무속적 분위기가 짙게 감도는 경주의 분위기는 어린 시절 김동리의 내면적 정서의 기조를 이루었다. 김동리가 작품을 통해 신라문화와 신라혼에 깊이 천착했던것은그의 작품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근대의 양면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며이에 따라 새로운 문명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주장했다는 점이 빛을 발하고 있다. 김동리 선생님의 작품 소재와 정서에서 우리들은 민족정신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으며 가장 한국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노벨문학상 본선가지 올라간 [을화]가 세계인들에게 환영받은 것은 토착문화의 전통을 인류의 보편성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김동리의 작품 [무녀도], [황토기], [바위], [등신불], [산화], [흥남철수], [을화]등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간의 운명적 삶의 공간을 토착정서를 배경으로 해서 구성한 작품이다. [선도산]은 경주를 사랑하는 김동리의 향수와 운명적 공간으로서 지역성을 소설화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것은 [무녀도], [황토기], [역마]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민적정서와 고향의식이다. [등신불]은 소신 공양으로 등신불이 된 만적선사의 인생 고뇌를 현재의 ‘나’ 의입장으로 다루어 인생의 구경적 운명을 불심으로 승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깊은 감동을 준다. [까치소리]는 까치소리에 빚어지는 인간의 운명적인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6.25전쟁 무렵 제대하여 고향마을에 돌아온 주인공 ‘나’가 어쩔수 없이 겪어야 하는 절망의 비극은 무녀도나 황토기의 주인공들이 겪어야 했던 생의 구경적인 허무주의의 토착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는 하찮은 미신으로 치부되던 무속신앙을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사로 자리 매김 하고 설화적, 민속적인 세계를 소설화 했으며 무시간성 영원성의 세계를 지향한 작가이기도 했다. 김동리의 설화적 세계는 현실공간뿐만 아니라 역사의 틈을 비집고 올라가서 전개되기도 하고 고대 동서양의 역사를 배경으로 자신의 문학적 스펙트럼을 확대시키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고대 신라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 소설들이 압도적으로 이들 작품중 이곳 경주(신라)가 많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을화]로 인해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던 작가로 평가받기도 하는데우리는 김동리 작가를 통해 우리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했다. 무당의 삶을 그린 가장 민속적이고 전근대적인 그러면서 가장 민중적이고 한국적인 작품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문학을 통해 우리는 우리문학의 세계적 가치와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 작가에게 감사함을 드리면서 신라를 빛낸 인물관 탐방을 마치고 불국사로 향하는데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려 산사의 고즈녁함을 더해 주었다. <법당과 탑이 서있는 기단위의 가람 자체가 불국을 상징하고 있는 불국사> 불국사로 올라가는 길 양옆으로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울긋불긋하게 치장한 연등들이 우리를 반겼다. 비에 젖은 초목들은 더욱 싱그럽고 잘 손질한 관음송, 산딸나무,왕벚꽃나무, 백송들은 우리를 충분히 힐링하게 했으며 비가 많이 오는데도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지만 떨어지는 빗방울로 동심원을 그리는 연못등의 아름다운 자태로 도심에 찌든 마음과 고단함을 위로해 주기에 충분했다. 『구름을 마시고 토한다』는 토함산(745m)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불국사는찬란한 신라 불교문화의 핵심으로 1,440년 전 신라 법흥왕 22년에 그 어머니 뜻에 따라 나라의 안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하여 세워졌으며, 그 후 신라 경덕왕 (742-764)때 재상 김대성이 다시 지어 절의 면모을 새롭게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건물은 물론 값진 보물들이 거의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다. 1920년 이전에는 일부 건물과 탑만이 퇴락한 채 남아 있었으나, 지속적인 원형복구 및 보수로 국보 7점을 간직한 오늘날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국사 다보탑은 조형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통일신라 석조미술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다보탑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을 현실공간에 탑으로 재현했을 뿐 아니라 경전에서 말하는 탑의 형태를 독창적 예술로 승화시킨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종교 미술에서는 그 이전부터 정해진 규범 안에서만 표현이 허용되기에 장인의 표현 범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형상은 32상 80종호를 벗어날 수 없으며, 탑 역시 지역적으로 부분적인 변화를 줄 수는 있으나 파격은 허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보탑과 석가탑은 독창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명작(名作)이다. 이 두 탑은 불교의 경전 가운데 법화경의 견보탑품에 의거하여 만들어졌다. 『법화경』에서는 많은 부분에 걸쳐 불탑 공양과 공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견보탑품」은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존재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된다. 다보탑의 정식 이름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이며 석가탑의 정식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이다. 다보여래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 이전의 부처였다. 그는 『법화경』을 설법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탑 모양으로 솟아나 그 설법의 진실을 증명하리라 다짐하였다. 그런데 석가모니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자 다보여래가 탑의 형상으로 땅에서 솟아났다. 두 탑은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여래와 그것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다보여래와의 만남을 묘사해 놓은 것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은 『법화경』의 공간이 된다. 이러한 내용을 절묘하게 건축으로 표현한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뿐이었다. 불국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바로 『법화경』에서 이야기하는 공간적장소가 되는 것이며, 각 석탑의 모습은 경전에서 언급된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면서 독창적인 모습으로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이므로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통일신라, 8세기 중엽, 높이 8.2m, 국보 제21호, 경북 경주시 진현동. 석가탑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에 하층기단을 짜맞추는 독특한 공간 처리 방법이다. 이는 실제로 돌이 많은 인도의 영축산에서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석가탑에서 이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가장 특이한 부분은 지표와 탑이 세워지는 공간 처리 방법이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그랭이를 이용하여 하층기단을 자연석에 맞도록 다듬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은 실제로 돌이 많은 영축산 위에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탑 주위에는 장대석으로 탑구를 마련하고 설법할 때 불국토의 부처님이 와서 앉는 각기 다른 모양의 연꽃을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여래의 반대편에 다보탑이 솟아나 있다. 「견보탑품」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그때 부처님 앞에 칠보의 탑이 나타났다. 탑의 높이는 오백 유순이고 넓이는 이백오십 유순이며, 땅에서 솟아나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여러 가지 보물로 이를 꾸미되 오천의 난간이 있고, 감실이 천만이고 수없는 당번으로 장엄하게 꾸며졌으며, 사면에는 다마라발전단의 향기가 나와 온 세계에 두루 가득 찼다. 여러 번개는 금·은·유리·차거·마노·진주·매괴 등의 칠보로 이루어져 그 높이가 사천왕궁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다보여래의 몸을 친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석가여래는 오른편 손가락으로 칠보탑의 문을 여니 그 안에 선정에 들어 있는 다보여래를 친견하게 되었다. 다보여래는 석가여래를 보고 '잘하고 잘하십니다'하며 석가여래에게 자리를 나누어 두 여래가 칠보탑 가운데 사자좌 위에 가부좌로 앉았다.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법화경』 「견보탑품」에 의거한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이러한 『법화경』 「견보탑품」의 극적인 내용은 일찍이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두 분의 부처가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은 돈황·용문 등의 석굴내 조각과 벽화로 수없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경전적인 해석을 탑이라는 건축물로 현실 공간에 재현한 것은 오직 불국사뿐이다. 더구나 기존에 존재하고 있지 않던 상상의 탑을 절묘한 형식으로 창안하여 다보여래의 탑을 만들어낸 것이다. 실제로 경전의 내용과 탑의 형상은 부합되는 면이 많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기단부 난간과 지붕돌 위에 있는 사각과 팔각의 난간, 사각의 난간 내부에 마련된 감실의 형태 그리고 곳곳에 배치된 연꽃의 화려함 등은 경전의 내용과 직접 비교가 가능하다. 통일신라, 8세기 중엽, 높이 10.4m, 국보 제20호, 경북 경주시 진현동. 경전에만 나타난 화려하고 온갖 보석으로 장엄되어 있던 다보탑을 신라인의 절묘하며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다보탑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증명하기 위해 땅속에서 솟아난 다보여래의 몸을 표현·상징하기 때문에 땅에 서 있지만 실은 공중에 떠있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났기에 다보탑의 구성은 상층부로부터 하층으로 원→팔각→사각이라는 구성으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계단 위쪽에 자리한 사자는 원래 4마리였으나 현재는 1마리만 남아 있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탑 기단 모서리에 사자를 넣어 사자좌 위에탑이 서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이 화엄사사사자석탑이다. 이러한 형식의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안되어 금강산 금장암지사사자석탑, 충북 월악산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 강원도 홍천 괘석리사사자석탑 등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이들의 연원은 바로 불국사 다보탑에 있는 것이다. 석가탑의 위대함이 다시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66년 해체·수리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서였다. 1966년 9월 도굴범에 의해 석가탑이 훼손되어 10월 전면적인 해체·수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2층 몸돌 윗부분에서 집 모양의 사리기와 사리병 등 각종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특히 함께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종이질이나 글씨체가 8세기 초기의 것이며, 너비가 비록 8㎝에 지나지 않지만 길이는 무려 6m에 이르는 두루마리 경전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밝혀졌다.  다보탑은 1925년에 일본 사람에 의해 해체·수리되었으나 사리장치의 행방은 묘연하다. 이와 관련된 보고서나 정황을 알 수 있는 간단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때 불상 두 구가 발견되었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 다른 사리구들에 대하여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 더욱 굵어진 비를 피하려고 회랑으로 들어서는데 ‘역사저널’에 나오시는 최태성 선생님을만나서 반가웠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주최한 인문학 탐방에 강사님으로 오셨는데 그 특유의 소탈함과 해박함에 매료되어 잠시 청강을 할 수 있었다.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 현재의 석가모니부처, 미래의 미륵부처님에 대한 설명과 민간 설화로 전해 내려온 석공 아사달과 그의 연인 아사녀의 안타까운 이야기와 함께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으로 더 잘 알려진 석가탑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고대사의 비밀이 숨겨진 석가탑의 현존하는 목판인쇄중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고 우리나라 탑중에서 한번도 열어 보지 않은 탑은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 석탑이라고 하셨다. 역시나 최고의 스타강사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선생님의 강의에 박수를 보낸다. 빡빡한 일정으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남산자락 동쪽에 위치하고 남산탑곡 마애불상군이 있으며 이육사 선생님이 한때 건강상 이유로 이곳에 피정을 오셔서 요양한 적이 있는 옥룡암으로 향했다. <살아있는 자연박물관이 있는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이 있는 옥룡암> 옥룡암이 자리한 남산은 수많은 불교유산의 보고로 노천박물관이라 불린다. 국립공원이면서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이며, 2000년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자타공인의 명소이다. 요소요소에 절터, 탑, 돌에 새겨진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연 박물관인이곳을 보아야 경주를 제대로 본다는 말이 실감이 간다. 경주 남산 탑골에 자리한 옥룡암과 마애불상군은 경주시에서 자연경관과 문화유산을 두루 살필 수 있는 ‘동남산 가는 길’에도 속한다. 이끼와 야생화가 예쁘게 피워 있는 계곡 길을 따라 올라 가니 소담한 규모의 동남산의 탑골에 있는 옥룡암과 함께 그 뒤에 웅장하게 서 있는 탑곡마애불상군이 있었다. 탑골마애불상군으로 오르는데 비가 와서 비탈진 길을 올라가는데 미끄럽고 힘들었지만 우리의 열정은 굴하지 않고 열공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남산 탑곡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탑의 골짜기라는 의미인데 골짜기 초입의 마애탑은 물론이고 신인사 3층 석탑이 있어 탑곡이라 하며 또는 탑을 새긴 부처바위가 있어서 탑곡이라 부른다고 한다. 옥룡암은 통일신라시대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나 현재는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들어선 옥룡암이 법등을 잇고 있다.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가 1943년 이곳 옥룡암에 자취를 남겼고, 한때는 경주지역 고시생의 공부처로 유명했던 옥룡암은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에 녹아든다고 한다. 옥룡암과 이웃한 탑곡마애조상군은 보물(제201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높이 약 9m, 둘레 30m에 이르는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네 면에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 금강역사상, 승상 등 총 24구가 남아 있다. 여기에 9층탑, 5층탑, 3층탑 등도 어우러져 당시 신라인의 불교세계를 이 바위에다 담으려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갖게 했다. 2기의 목탑은 세부적인 표현이 충실하게 나타나 있어 현존하지 않는 신라시대의 목탑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정확한 자료가 없으면 문화재 복원이 어려운데 이러한 기록으로 황룡사 9층 목탑도 복원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신라시대 조각은 이미 희미해졌지만, 이 바위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오래전 석공의 정성과 바램을 생각해 보며 외적의 침략으로 떨어지고 마모된 조각품을 보니 우리 조상들의 아픈 역사와 고단했던 삶을 생각해 보며 국력이 얼마나 소중함을 깨닫는다. 바쁜 일정관계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신라 천년왕궁의 궁궐터인 월성지구로 향했다.      <1300년전의 신라시대의 궁궐터였던 월성지구> 이곳은 1300년전 신라시대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집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반월성이라고도 불려졌다. 파사왕 22년에 이성을 쌓아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으며 그 이후로 신라 역대 왕들의 거처가 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가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 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를 사위로 삼았으며 석탈해는 나중에 신라 4대 왕이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누각과 관청, 황궁을 비롯한 많은 부속건물들이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남천이 흘러 자연적인 방어시설이 되었고 동쪽과 북쪽, 서쪽으로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문터와 성벽 밑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인공 방어 시설인 해자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혁거세 21년에 궁을 만들어 ‘금성’이라 불렀으며, 새로 쌓은 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의 금성이나 만월성이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길 하나를 두고 갈라져 있는 안압지와 더불어 월성 일대는 신라의 궁궐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고 한다. 경주 월성은 ‘반월성’이라고도 하는데, 반달 모양으로 구릉을 깎아 흙과 돌을 섞어가며 궁의 주위를 감싸 안도록 쌓은 성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신라가 망한 뒤로 궁을 보호하는 기능이 약해지면서 자연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없어진 것을 수리하거나 보존하지 않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조선 영조 14년(1738) 월성 안에 만든 얼음 창고인 석빙고는 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고, 길이 19m, 너비 6m, 높이 5.45m의 석실[돌방]은 직사각형으로 만들어 졌는데 약 1000여 개의 돌이 쓰였고 천장 외부는 봉토의 형상이다.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 구멍 셋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고 계단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어 있다. 지금의 경주 월성에는 아무런 건물도 남아 있지 않고 그저 숲이 우거지고 텅 빈 뜰에 잔디가 깔려 있을 뿐이다. 유적의 발굴과 복원으로 그 옛날 화려하고 왕성했던 궁궐이 복원 되기를 기대하며 오늘 탐방의 마지막 장소인 예기소로 향했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마지막 배경장소인 예기소와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의 부질없음을 시로 읊은 금장대와 옛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남긴 암각화> 예기소로 가는 길에는 예쁘게 핀 노란 애기 똥풀이 지천으로 피어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예기소는 명주꾸리 하나가 다 들어간다는 깊은 소로 옛날에는 별별 전설이 다 붙어 있는 무서운 소였다고 한다. 예기소는 소설 [무녀도]의 마지막 배경이 되는 장소로 어느 부잣집 며느리가 예기소에 몸을 던졌는데 무당 모화가 굿을 하며 넋대를 휘젓어 청승에 자지러진 목소리로 혼백을 부르며 그녀도 물속으로 잠기어 죽음을 맞는다. 예기소위에 있는 금장대는 경주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 있던절 혹은 건물의 이름인 금장을 따서 ‘금장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은 그 경치가 매우 빼어나 경주의 하늘을 지나가는 기러기들이 쉬어 간다고 하여 경주의 8가지 기이한 현상가운데 하나인 ‘금장낙안’이라 불리워지던 곳이기도 하다. 금장대 아래에 만들어진 예기청소는 형산강의 본류인 서천과 북천이 만들어낸 것으로 [무녀도]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자비왕때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회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을 비롯해 몇까지 설화가 전해 오는 곳이다. 이러한 금장대는 빼어난 경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사시대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자 예술작품인 암각화가 있으며 조선시대의 시인 묵객들이 “금장낙안”의 풍광속에서 신라의 흥망을 생각하며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 삶의 부질 없음을 인식하면서 과거를 통해 오늘을 경계하며 시를 읊조리던 공간이었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읍성을 수복하기 위한 정찰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왜군들이 부산을 통해 동해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던 곳이었다. 이곳의 빼어난 풍광을 보며 인간의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다시 삶으로의 환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신경주역으로 향했다.                            <  맺                음                  말> ‘한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고도 경주에 와서 20세기 소설과 시의양대산맥으로 획을 긋는 두 작가와 작품의 연관이 있는 곳을 다니며 보고, 듣고, 느끼는 소중한 인문기행이었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고향을 사랑하며 고향과 연관된 소설을 쓰신 김동리 작가는 자기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 근대 문학에서 사상적 깊이를 추구하려고 고민하고 애쓴 작가로서 존경심을 보낸다. 끊임없이 자기 사상을 추구하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고 했던 그는 정말 경주를 사랑한 작가이며 50년의 작가 생활 동안 작품 수나 분량면에서 한국 근대 최고의 소설가이다. ‘국민시인’이라 칭함을 받는 박목월시인의 시는 아직도 우리의 마음과 정서에서  항상 기억되고 회자되는 아름다운 시로 고단하고 지친 일상의 청량제 같은 정든 고향 같은 마음을 주는 포근한 안식처다. 이번 탐방을 통해서 역사적인 유적과 유물의 도시로만 알았던 고도경주를 한국의 뿌리와정체성을 알 수있는 문학의 산실임을 알게 된것도 큰 인문적 수확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문학 작품을 통해 인문적 가치를 좀 더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인문열차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삶의 여유와 혜안을 가지게 하는 좋은 문화 발전소로 지속되기를 바라며 우중에서도 강의로 수고하신 강사님과 진행으로 수고하신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인연으로 길위에서 만난 탐방에 동행했던 선생님들 같은 관심으로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다음 기회에도 소중한 인연으로 뵙기를 바라며.... 인문열차 화이팅!!!!!!

    김옥란 20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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