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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백산맥 문학기행 '지식은 나눌수록 커진다'

    태백산맥 문학기행 '지식은 나눌수록 커진다'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 11월 탐방지  - 아름다운 보성, 여수 잘 다녀 왔습니다. 우리 민족이 살아온 길을 걸어보고 역사현장에 서서 해설사님의 진솔한 설명과 체험을 들어 봄으로써 굳어 있었던 관념을 부서뜨리는 경험을 통해 보석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이가 듦으로 뼈가 단단해지고 생각과 사고가 굳어져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안되고, 부모얘기는 잘 듣지 않으면서, 또래 친구얘기는 하나님처럼 잘 믿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신적 체조같은것이 여행인데, 문학여행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나보고, 딱딱한 사고를 유연하게 변화시켜 주는 마법같은 힘을 발휘합니다. 주변사람들, 특히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이해 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음으로써 나의정신체조를 젊고 활기차게, 건강하게 만들어 갑니다. 이번 탐방지를 돌아보면서 느낀점은 가 보지 않고, 들어보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내용을 접하면서, 이런 아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지탱해 주는 문학기행, 태백산맥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전통적 한옥으로 지은 '김범우의 집'과는 집 구조가 매우 대조적인 현부자네 별장 - 겉모양은 대체로 조선식이지만 내부는 일본식으로 기묘하게 결합된 곳이다                              뚝방 20리길이라고 부르는 기나긴 방죽길, 안쪽이 중도들판이다. 일인 지주 중도(나까시마)가 백마를 타고 다니면서 소작인과 농토를 관리했다는..방죽 밑에 뻘밭에서 게들을 잡기위해서 하대치의 아이들 광조와 덕순이가 나와서 그리운 이름을 불렀던 곳 - "아부우우지이이이"  아부지는 산에 있지만 아이들은 뒤돌아서서 바다를 향해 불러야 했던 것이다.             중도방죽 데크위에서 감미로운 목소리, 맛깔진 사투리로 상황극을 연출하시는 미래의 배우님들 - "워따 말도 마씨요, 고것이 워디 사람이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해 사는 가난허고 가난헌 개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돼지맹키로 천대받어감서 헌 일이제라...장딴지고 허벅지꺼정 푹푹 빠지는 뻘밭에서 돌짐 지는 고초에야 비하겄소?"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된 홍교(무지개다리, 횡겟다리) - 빈농들 설 쇠라고 빨치산들이 쌀가마를 쌓아놓아 심리전을 펴던 곳이다. 이 횡겟다리 위에서 작가 조정래선생님은 [태백산맥]이라는 제목을 얻게 된 배경을 김범우의 입을 통해 설명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소설 태백산맥 테마공원 - 작가 조정래 선생님의 조각상은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사진으로 보면 양각으로 보인다. 신기하게도 방향을 따라서 시선이 따라 온다.                       벌교남국민학교(현 벌교초등학교)에서 살생부가 되었던 손가락 총 상황극 - 이유도 없이 죽어야 했던 당시 상황들이 극중에서도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던 몰입도 최상의 연출이었다. 태백산맥 테마공원 뒤로 아름다운 벽화가 골목골목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가슴저리던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애써 잊고져 하는 몸부림인가 사랑스런 벽화가 가득 그려져 있어 조용한 마을을 탐색하고 싶은 나그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보성 다비치 콘도 앞바다 아름다운 일출 장관 - 해는 또 다시 떠 오르고 새 날은 밝았다. 보성 다랭이 녹차밭 - 버스에서 내려 첫 발을 내 딛는 순간,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가을의 절정을 알리며, 우뚝 서 있는 자태, 불타는 단풍이 아픈 가슴 떨어내고 울분을 토하듯 그렇게 서 있었다.                                                                           한반도  최대의 녹차밭 - 사철 푸른 차밭은 마음을 붙잡고 그 내음에 취하게 만든다. 삶에 지친 길손들은 오아시스 같은 이 차 밭에서 다시 힘을 얻고 사랑도 차 향처럼 더욱 짙어져 간다. 1949년 1월 13일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된 사람 중 125명이 이곳에서 총살되고 시신이 3일간 불태워져 큰 바위로 덮였던곳. 후에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하라며 '형제묘' 라 이름 붙인 곳이다. 오동도 - 섬의 모양이 오동나무 잎을 닮았고, 오동나무로 울창한 숲을 이루었던 섬, 왕의 기운이 있다하여 모두 베어 버렸다는 섬, 지금은 대나무가 많아 죽도라고도 불리운다. 국내에서 손 꼽히는 동백꽃 자생지이며 해식애가 발달해 여러 기암절벽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현숙 2018.11.16

  • 소설[태백산맥]문학기행을 다녀와서

    소설[태백산맥]문학기행을 다녀와서

                                    <여 는 글> 여행하기에 최적인 삽상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아파트를 나서니 어제 내린 비로 소복이 쌓인 형형색색의 낙엽들이 무지개 융단을 깔아 놓은 듯 가을 정취에 흠뻑 취하게 하는 행복한 아침이다. 설레는 마음을 뒤로 하고 이 번 탐방 주제인 소설 [태백산맥]속에 나오는 우리 민족이 살아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로 데려다 줄 순천행 KTX에 몸을 싣고 일상을 떠나는 설레임과 함께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에 순응하는 초목들과 오밀조밀한 우리 산야를 보니 언제나 정감으로 다가온다. 새날을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몸치장으로 알록달록하게 단장한 단풍들은 우리 눈을 호강시켜 주었고 가을걷이가 끝난 텅빈 들판에 비니루에 돌돌 말려 있는 짚들은 퍽이나 인상적이다. 올해의 마지막 탐방지로 달려 가는 기차안에서 일행들의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는 행복한 담소도 정겹게 들리는 것은 여행의 들뜬 마음의 여유가 아닐까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8.15를 지나 6.25을 거치며 근.현대사의 고단하고 암울한 삶을 살아냈던 민초들의 삶의애환을 생각하며 공간이동으로 땅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는 그리하여 역시자지 하는 마음으로 다른 것을 만나므로 인식을 바꿀 수 있고 생각 단지를 키워주는 인문열차 여행은 그래서 항상 많은 사람들의 선망과 경쟁을 낳게 하는것 같다. 이번 문학기행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간접 경험 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서 나이 들어 단단해 지는 사고와, 생각과, 감각을 유연하게 만들어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어른으로 살고 싶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세계적인 습지 순천만과 세계국가정원이 있는 순천에 도착하니 바람 맛과 하늘빛이 다른 시리도록 파란 순천의 가을하늘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 소설‘태백산맥’의 주무대이며 꼬막으로도 유명한 벌교> 소설속의 별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였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 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지 이기도 했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같은 규모의 읍의 비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모든 물산이 배로 이동하면서 한벽한 어촌이 일제시대에 쌀 수탈로 인해 번창한 지방이었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 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졌고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쫒아 유입인구가 늘어나면서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 벌교에도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가서 돈자랑,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자랑 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일제시대 수탈이 이곳 벌교에서더 심했을 것을 가늠하게 된다. 지금은 옛날의 아픈 역사를 알린 작품[태백산맥]과 꼬막이 지역경제를 살린다 하니 이곳은 뼛속까지 태백산맥과 함께 하는 듯하다. 심지어는 화장실에도 소설 태백산백 나오는 장소를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을 보니 한량없는 긍지로 사는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있는 이곳 특산물인 벌교 꼬막정식은 꼬막으로 시작해서 꼬막으로 끝나는 꼬막 뷔페라고나 할까? 꼬막정식을 맛있게 먹고 식당에서 가까운 소화다리로 갔다. <   난간없는 다리로 학살장이 되어 버린 소화다리  > 소화다리는1931년 6월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서 원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였던 그 때가 소화 6년이기도 해서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알려져 있고 지금도 대부분 소화다리라고 부른다. 이 다리는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서 6.25의 대 격랑이 요동 치면서 남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양쪽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위에서 총살형이 이루어 졌던 곳이다. 소설속에서도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하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다는 표현과 포구의 갈대밭의 마구 버려진 시체들을 찾아가는 장면의 묘사등 그 때의 처참상을 상상하니 참으로 가슴을 저미듯 마음이 아려 온다. 일제 말의 공출도 이 다리를 통해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 때의 아픔을 아는 다리 밑의 갈대와 무심히 흐르는 갯물만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함을 말해 주는 듯 하다. 다리 옆에 제15대 벌교 읍장 김수송씨가 지은 [소화다리] 시비에 쓰인 시를 읽으니 그 애통함과 애절함에 심장이 멎는 듯 아프다.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함께 그 원혼들을 달래는 행사가 매년 다리위에서 있다고 했다. <  민족의 허리잇기의 염원을 담은 태백산맥 문학관>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하고 민족의 허리잇기의 염원을 담은 태백산맥 문학관으로 향했다. 총 4부 10권의 대장정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우리 민족의 염원과 분단의 고착을 살피고 그 안에 내재된 모순의 반성을 통해 분단을 극복하는 곧 통일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 작품은 첫 연재에서부터 화제를 불러 모았고 20세기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문학작품으로 주목받는 등 우리 문학사에 대한 거대한 금자탑을 쌓았다. 작가는 [태백산맥]출간 후 11년간 한국전쟁의 비극성을 적나라하게 표출해 이념의 금기지대를 깊숙이 파헤쳤기 때문에 작품의 불온성 시비에 휘말려 고초를 겪기도 했다. 치열한 작가정신을 바탕으로 조정래 문학의 절정을 이룬 [태백산맥]은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주는 것을 넘어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민족분단의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영원한 한국문학의 고전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제석산 끝자락에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의 첫 탐방지인 조정래 작가의 문학작품을 전시해 논 [태백산맥]문학관은 민족의 허리잇기의 염원이 언젠가는 성취될 것으로 믿고 그 믿음을 건물에 고스란히 담아낸 건물이었다. 소설 [태백산맥]이 어둠에 묻혀 있던 우리의 현대사를 들춰 냈다는 의미를 자연스럽게 절제된 건축양식에다 한 발 물러선 듯 한 모습으로 시각화 했고 우리 민족이 겪은 질곡의 역사를 극복하고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의 아픔을 종식하는 통일의 간구를 고구려 고분 벽화의 모자이크 기법으로 표현한 최초, 최대의 옹석 벽화로 백두대간의 염원을 벽화에 묘사함으로 소설의 문학성을 높이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건축적 언어로 담아낸 건물로 서로 보안하고 도움으로써 문학과 건축과 미술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문학관이다. 전시실은 작가의 지금까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특히 여섯째 마당의 필사본 전시실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필사해서 기증했는데 얼마나 이 작품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직 비어 있는 칸을 채울 수 있게 우리 민족이 살아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 그리고 남.북이 진정 하나라는 꿈과 용기를 심어준 작품을 꼭 필사해서 전권을 읽었지만 쓰면서 그 깊이와 높이를 진실로 깨닫고 싶다. <월녀의 딸인 소화집과 정하섭과 소화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인 현부자네집> 문학관 바로 옆에 있는 소설속의 소화네 집은 현부자가 제각과 별장을 신축하면서 전속 무당이 거처할 조그만 집을 바깥 터에다 1900년초에 마련해 준것이다. 소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작품에서는 이 집의 신당에서 정참봉의 손자 정하섭과 무당 월녀의 딸 소화가 애틋한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 길고도 아픈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분의 차이도 있지만 근친상간인 금지된 사랑은 여순사건이라는 일탈적 공간을 맞아 비로소 꽃피는데 그 꽃은 목숨을 바쳐서 피는 꽃이기에 애절함으로 다가왔다. 소화집 옆에 현부자네집이 있다. 중도 들녘이 질펀하게 내려다 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서 있는 이 집은 일본식과 조선식 건축양식이 기묘하게 결합된 곳이다. 겉모습은 한식이지만 내부를 보면 일본식인 이 집의 구조는 조선에 살지만 일본식 생활을 동경했던 집주인의 마음을 담고 있다. 실제로 박씨 문중은 아들들이 모두 일본유학을 마친 소위 ‘개화부자’들이었다. 소설속에서는 현부자네 별장으로 묘사되었지만 원래는 박씨문중의 별장으로 쓰이던 곳이다. 이곳에서 문학기행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상황극이 연출되었다. 배우들은 이곳에서 각자 생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선도하는 뼛속까지 자기 고향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기쁨도 슬픔도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사람들이었다. 현부자집 마당에서 지주와 마름의 수탈로 암울하고 고통스런 질곡의 세월을 산 소작인들의연기를 보니 소설속 장면들을 옮겨 놓은 듯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러면 지금은 그 때와 다른가? 지금도 돈과 권력으로 갑질을 하는 현상들을 신문이나 뉴스를 볼 때 인간의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과 욕심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진실을 가장한 교묘함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비일비재 일어나는 것을 보면 어떠한 삶이 과연 가치 있는 삶인지 어른으로서 많은 반성을 하게 한다.      <민초들의 한숨과 피와 절규로 만들어진 중도방죽> 중도방죽은 일본인 중도(나카시마)의 이름을 따 붙여진 간척지 방죽의 이름이다. 철길에서 바다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길이 바로 중도방죽 길이다. 뚝방 20리길이라고 부르는 기나긴 방죽길 그 방죽 안쪽이 중도들판이다. 중도라는 사람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온 실제 인물로 철다리 옆에 있는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중도는 백말을 타고 순찰 했다고 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간척지의 방죽을 쌓던 때 그 어렵고 뼈빠지게 힘들었던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워따 말도 마씨요, 고것이 워디 사람이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허고 개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돼지 맹키로 천대 받어 감서 헌 일이제라. 품삯도 제대로 쳐주지 않고 끝이 없는 노동으로 피 고름을 흘리며 살았을 그 당시의 민초들의 삶을 간접체험하는 현장 상황극을 하면서 그 때 노역한 사람들의 노고가 너무나 안쓰럽고 가여웠다. 지금은 가을 바람에 갈대들의 춤사위가 그들의 고단하고 힘들었던 영혼를 위로해 주는듯 한적한 포구만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방죽에 쌓인 돌맹이 하나 하나 흙 한삽 한삽이 조선사람들 핏방울이고 恨 덩어리로 만들어진 중도방죽을 뒤로 하고 김범우 집으로 향했다. <덕이 있고 소작인들에게 인자했던 소설속 김사용의 아들인 김범우의 집> 꼬불꼬불한 한적한 마을길로 들어서 돌담이 높게 둘린 장군봉을 마주보고 있는 김범우의 집은 원래 대지주 였던 김씨 집안 소유의 집이다. 안채의 대문옆에 딸린 아래채에서 초등학생이었던 작가의 친구인 이 집 막내아들과 자주 놀았다는 것은 작은 흥미를 일으킨다. 소설에서는 품격 있고 양심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3년전에 방문했을 때는 꽤 정갈하게 보였는데지금은 사람이 거처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많이 퇴락되어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니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서 빈집이었다. 주인은 서울에 살며 한번씩 다녀간다고 했다. 집안에 들어가서 벽이 허물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관리가 소홀한 것이 눈에 보였다. . 뒤곁에는 가을 빛에 예쁘게 물든 감나무의 감이 정겹게 달려있고 주인 없는 마루에 걸려 있는 달력과 시계가 오고 가는 길손들을 맞았다. 이 곳에서도 상황극을 연기 했는데 김범우의 아버지인 김사용의 인자한 인품을 탱자나무에 얽힌 사연으로 잘 연기해 주었다. 똑 같은 지주이지만 생명을 귀하게 여긴 소설속 어른신에게 경외를 보내고 싶다. 실제 소유주와 관계기관이 잘 협력해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곳이 잘 관리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 304호에 지정된 홍교로 향했다. <벌교에서 가장 오래 된 다리인 보물 제 304호에 지정된 홍교> 홍교는 벌교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조선영조 5년에 순천 선암사의 승려인 초안과 습성 두선사가 지금의 홍교를 건립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에 지정되어 있다. 이 곳 사람들은 이 다리를 ‘횡개다리’로 부르며 소설속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명물로 인정받고 있다. 횡개다리를 뒤로 하고 청년단이 있었던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태백산맥 문학의 거리에는 작가의 부조물과 작품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요약해서 대리석에 붙여 놓았다. 그야말로 벌교의 모든 곳이 다 태백산맥의 무대였다. <형인 염상진과 대비되면서 민족상잔의 분단, 갈등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청년단이 있던 자리> 소설속 염상구의 아지트인 청년단 자리는 형인 염상진과 대비되면서 민족상잔의 분단, 갈등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소설속 염상구의 아지트인 청년단이 있었던 곳이다. 이 곳은 원래 일본식 2층 건물이었다. 아래층은 일본인들 전용이다시피 했던 벌교유일의 공중목욕탕이 있었고 2층은 창살과 처마 같은 데가 아주 섬세하게 꾸며진 건물이었다. 목욕탕도 폐쇄되고 2층도 사용하지 않아 꽤 낡긴 했지만 1995년 무렵까지 그 건물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취없이 헐려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그 2층에 염상구의 아지트인 청년단이 들어 있다.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는 소설속 인물중에 염상구는 악한 듯 하면서도 선하고 잔인하듯 하면서도 인정이 있는 그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벌교 금융조합이 있던 자리> 벌교금융조합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붉은 벽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깍아 넣어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관공서형 건물로 즐겨 지었던 그 모습이다. 소설에서는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온 이력을 지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가 척결되지 못한 이 땅의 비극이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그런 식으로 기득권을 행사했음을 작가는 여러 주인공들을 통해 일깨우고 있다. <손가락 총으로 학살이 자행된 뼈아픈 동족상잔의 피비린 내를 낳게 했던 벌교초등학교 운동장> 보이는 곳 모두가 태백산맥의 무대이지만 소설속에서는 벌교남국민학교(현재는 벌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그 당시의 참담했던 죽이고 죽는 손가락 총이라는 상황극을 재현했다. 토벌군도 내 백성이요, 빨치산도 같은 동족인데 이런 상황이 벌어 졌던 그 시대의 참담함을 간접으로 체험해 보는 소중하고 마음 아픈 시간이었다. 정작 죽어가는 본인들도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손가락이 자신에게 향하면 죽어야 했던 참담했던 우리의 아픈 역사를 보게 된다. 자신의 생각과 이념이 다르면 적으로 여기는 현재도 우리사회에 진행헝인것 같아 서글프고 안탑깝다. 해설사님의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부른“부용산”가는 우리의 무거운 마음을 다독여 주어 그저 그 때의 참상에 애잔함을 더해 주었고 지역과 연극을 사랑하는 연기자 분들께 한없는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토벌대들의 쉼터였던 남도여관> 남도여관은 검은 판자벽에 함석지붕,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로 옛 모습 그대로이다. 벌교초등학교와 맞붙은 검은 판자를 두른 일본식 목조 건물이 바로 남도여관이다.일본인들은 강점기 동안 전국적으로 이런 건물을 수없이 지었는데 그러나 이후 이런 건물은 무차별적으로 헐리고 시멘트 건물들을 짓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이런 건물들은 구경하기 어려운 귀물이 되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에도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이곳에서 임만수 토벌대장이 부하들과 함께 한동안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지금은 1층의 일부는 살림집이고 2층은 다다미방으로 비어있다. 세월의 먼지가 쌓인 다다미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넓직한 방들 4칸에 어느 켠에선가토벌대들의 땀냄새, 피냄새, 담배연기가 금새라도 왈칵 피어오를 듯하다. 그들 또한 자신의 소신보다는 살아 내야 된다는 절박감에서 동족상잔의 한 몫을 담당했으리라는 생각과 그저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절대명제속에서 살아 갔을 그들 또한 역사의 희생자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은 방이지만 그때의 고뇌와 한숨과 절박감들을 느끼며 첫째날 탐방을 마치고 보성에 있는 다비치콘도로 향했다. 정갈하게 차려진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와서 처음 뵙는 동행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아픈 역사로 무거웠던 몸과 마음을 쉬게 해주는 달보드레한 꿈나라로향했다. 여행 둘째날 아침 단장을 마치고 호수처럼 잔잔한 득량만이 안겨준 고운 은빛 모래와 해송들의 어루러짐이 아름다운 율포해변의 떠오르는 해를 보여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를 느꼈다. 등대 위에서 끼룩끼룩대는 갈매기들의 노랫 소리와 부지런한 어부들의 갯벌에서 손놀림을 뒤로하고 콘도로 돌아와 정갈하고 맛있는 사골우거지탕을 맛있게 먹고 탐방 둘째날 일정으로 향했다. 여순 사건의 뼈아픈 역사현장으로 가는 길에 진행팀장님의 배려로 우리는 초록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보성차밭을 볼 수 있었다. 보성은 한반도 최대의 녹차밭이 있는 곳으로서 보성에서 율포로 가는 산하는 녹차와 그 향기로 덮여있다. 사철 푸른 차밭은 마음을 붙잡고 그 내음에 취하게 만드는데  삶에 지친 길손들은 오아시스 같은 이 차밭에서 다시 힘을 얻는다고 한다. 보성은 쪽빛 바다와 차밭 국내 최초의 해수 녹차탕과, 해수풀장, 제암산 자연휴양림 등이 있어 일상생활에 지친 많은 이들의 편안한 휴식처가 된다고 한다.1시간 10여분을 달려 올해로 70년을 맞는 여순사건의 현장인 여수에 도착했다.여수지역사회연구소 위원장으로 활동하시는 박종길 선생님께서 여순사건의 해설을 해주신다고 했다. <동족이며 이웃인 사람들들의 피맺힌 한을 남긴 여순사건 이야기과 흔적들> 여순사건의 대략개요는 1945~1948년은 대중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된 시기로 좌.우.중간파 정치세력의 운동이 가장 활성화 되었으며 친일파 처단과 토지문제 해결이 가장 중요한 정치, 경제적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당시 우익은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좌익은 모스크바삼상안의 절대지지로 좌우대립이 심화하던 상태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발언으로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된다. 좌익세력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제주 4.3항쟁이 발생하게 된다.이승만정부는 1948년 하반기에 본격적인 진압을 계획하고 여수 주둔 14연대의 제주도 파병을 명령하였으나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국즉시 철수를 주장하며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면서 박승훈 중령이 연대장이던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을 진압하라는 제주 출병명령에 지창수 상사등이 거부하여 회식중이던 장교들을 사살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여순사건 다음날 이순신광장이 있는 중앙동에서 14연대 군인들이 친일인사 13명을 죽이고 치안접수 과정에서 경찰이 13명 희생되어 26명이 반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해 이들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14연대 군인들을 폭도로 간주한다. 그것이 지금도 서로가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한다. 현재도 금기시 되는 문제로 양극으로 갈리어 앙숙이 되어 여순사건에 대해 박종길 위원장님 께서는 이 사건에서 가족과 친지가 희생되지 않았지만 여수를 사랑하는 시민으로서 주도기준을 옳고 그름이나 이데올로기의 초점을 맞추다 보면 문제을 해결할 수 없으니 거시적인 안목으로 역사의 초점에 맞추어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하는 것이 지역사회연구소의 희망이라고 하셨다. 여순사건의 희생의 대부분은 관계없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덮어씌우고 전체적으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어간 양민들이다. 정치적 상황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했다. 좌.우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사과하고 추모해야 한다고 하셨다. 정말 우리가 쏘아버린 화살, 지나간 시간, 떠나간 강물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다.  미움은 미움을 낳기에 궁극적으로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는 특단의 결단들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사랑할 자를 사랑하는것은 아무라도 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것이진정한 사랑이기에 사랑의 상처를 허락하여 좋은 소통이 되려면 상대에 대한 존중과 스스로에 대한 겸손만이 단절된 소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 명 동 매 장 지> 호명동 암매장지는 종산초등학교에서 수용되었던 부역혐의자 중 일부는  야음을 틈타 인적이 없고 후미진 호명동 야산으로 끌고와 며칠에 걸쳐 학살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90년대초 이 일대의 도로공사 중에 많은 유골이 발견되었고 1998년과 1999년 2회에 걸친 유골 발굴에서 5구 이상의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한 구의 두개골 에선 총탄 자국이 뚜렷한 유골이 발굴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부역혐의자는 역적 무리와 힘을 같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가까운 둔덕동 용수부락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나간 트럭과 실려 간 사람들을 보았을 때호명동 야산에서만 100여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한동안 이곳은 시체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고 한다. 여수의 암매장지는 이 곳 호명동외에도 봉계동의 큰골과, 작은골, 민드래미 골짜기, 만성리 골짜기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희생자에 대한 신원과 규모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진상이 규명 되어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의 혼을 달래주기를 고대한다. 참고로 이곳은 박종길 위원장님께서 직접 발굴하셨고 표지판에 자세한 설명과 그림까지 곁들여 그 때의 참상을 알 수 있게 해주셨음에 감사했다. 지금은 시멘트 옹벽으로 변해버린 발굴현장을 뒤로 무거운 발걸음을 또다른 슬픔의 장소인 만성리 형제묘로 향했다.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하라고 합장을 한 만성리 형제묘 희생지> 만성리 학살지와 널리 알려진 형제묘는 학살 후 희생된 시신들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하라며 ‘형제묘’라 이름 붙인 곳이다.여수사건의 부역혐의자로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중 125명이 1949년 1월 3일 이 자리에서 총살되고 불태워졌다. 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하였으며 본인들이 죽을 장작더미를 지고 왔는데 위에 기름을 부어 불로 태웠고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다고 한다. 이 곳 ‘형제묘’는 집단매장지로서는 시신들이 가장 많이 묻혔다고 한다. 더욱 안타까운것은 희생된 가족들이 유족회를 만들어 세운 비석의 비문을 다른 돌로 덮어 버려서 비문 내용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상황을 보면서 서로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함을 느꼈다. 질곡의 세월속에 희생된 영령들게 묵념을 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다음 행선지로 돌렸다. 걸어서 마래 2터널를 지나는데 이 터널은 자연암반을 뚫은 것으로 마래 1.2터널이 있는데 1터널은 1926년 일제가 군량미 창고로 쓰기 위해 설계한 것이고 그 옆으로 나란히 판 2터널은 군사도로로 사용하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2터널 만 있고 하나 밖에 없는 차선이 신호에 따라 양쪽에서 한쪽이 기다리고 나서 반대편에서 와야 하는 생소하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밥도둑이라는 게장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14연대 주둔지로 향했다. <1948년 여순사건을 일으킨 육군 제14연대 병영이 있던 자리> 본래는 일제 때 일본의 해군기지가 있던 곳이었다. 해군 202부대가 있었고 비행기 활주로와 격납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 곳은 1948년 여순반란을 일으켰던 14연대 병영이 있었던 곳이다. 예부터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을 강제로 이주 시킨 후 일본과 미군에 이어 한국군의 병영지로 쓰이다가 화약공장이 들어서기까지 민족현대사의 아픔과 질곡을 간작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이다. 이후 제 15육군병원, 보사부 결핵환자 자활촌을 거쳐 1976년 7월 23일부터 현재까지 한국화학 공장에서 특수폭약과 포탄용 폭약을 만든다고 했다. 그 때의 건물중 지금 유일하게 남은 높은 굴뚝만이 참상을 아는듯 을씨년스럽게 서있었다. 아픔을 뒤로 하고 예정에는 없었지만 여수의 상징인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오동도로 향했다. 원래는 육지에 맞대어 있는 섬이라 하여 대섬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오동도라 불린다. 오동도는 여수시에 있는 섬으로 멀리서 보면 섬의 모양이 오동잎처럼 보이고, 예전부터 오동나무가 유난히 많아 오동도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는 곳곳에 이 섬의 명물인 동백나무와 조릿대의 종류인 이대를 비롯하여 참식나무, 후박나무, 팽나무, 쥐똥나무, 등 193종의 희귀 수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 자생하는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데 그 때문에 ‘동백섬’ 또는 ‘바다의 꽃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최초로 수군 연병장을 만들었고 이곳의 조릿대의 이대로 화살을 만들어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고 한다. 1933년에 길이 768m의 서방파제가 준공되어 육지와 연결되었고, 1968년에는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69년에는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섬 전체는 완만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은 암석해안으로 높은 해식애가 발달해 있고, 소라바, 병풍바위, 지붕바위, 코끼리바위, 용굴 등으로 불리는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룬다. 1998년에는 오동도 관광식물원이 개장되었다. 섬 남단에 오동도 등대가 있다. 발목이 많이 아파서 섬 전체를 둘러 보지는 못하고 음악분수대쪽으로 내려와서 코끼리 열차를 타고 나와 여수역에서 기차를 타고 고단하지만 이 곳 여수에서 발생한 민족현대사의 아픔과 질곡을 간직하고 있는 여순사건에 비극의 현장을 탐방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맺     음     말> 산빛 물빛 바람맛이 다른 천고마비의 계절에 ‘명품 인문열차’와 함께 우리 민족이 살아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태백산맥 문학기행]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우고, 느낄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한 여행이었다. 소설 [태백산맥]은 우리 현대사의 물줄기의 궤적을 제대로 그려내어 오늘의 역사를 이어주는 작품으로 우리의 분단사를 역사보다도 더욱 역사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8.15 이후의 민족분단 과정과 6.25를 중심으로 하는 분단고착 과정들이 스며있는 질곡의 뿌리와 실상을 집요하게 파헤쳐 보여줌으로써 우리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정확한 이해의 길을 터놓은 한국근대사의 총체적 양상과 복합적인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투시하는 대상으로 대형서사문학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작가가 파악하고 있는 민족분단의 문제는 정치적 이념에서가 아니라 민족의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본래적으로 얽혀 있던 왜곡과 굴절이 심한 격랑의 분단사속에서 각계급. 계층에 속한 인물군을 폭넓게 그려 그 시대의 전형적 인물로서 그들이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을 정밀하게 묘사하면서 어느 한쪽의 사상이나 관점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여 사상이나 인물에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면서 빨치산의 역사적 의미를 드러낸 유일한 소설이다. 작품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현지답사와 탐문과 증언을 통해 이 소설이 태동되어서 그런지 그 생명성과 탁월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글 작업을 위하여 투혼을 불사르는 열정과, 성실함, 자신을 녹이는 촛불처럼 사심을 보니 단 몇 단락의 글을 쓰는 것도 어렵고 힘든 우리로서는 글 감옥에 같혀 수 년 동안 칩거를 하며 집필활동을 위하여 많은 관련된 사람을 만나고  여러 현장을 다니며 탐문과 진실을 드러내려는 열정과 용기에 존경과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섬세한 문체와 소설속 질퍽한 전라도 사투리는 백성들의 고단하고 암울했던 삶만큼이나 절절이 심금을 울려주었다. 밤을 새가며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어쩌면 이 책을 통해 나는 역사의식이 고취되었고 문학의 위대함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현대사의 피고름을 뚫고 솟아 오른 [태백산맥]은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사는 우리에게는 현재진행형이다. 요즈음 남.북관계가 우호적으로 진행되는 시점에 지난 세월 우리민족의 아픔들이 끊어진 허리가 이어지는 통일이 되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분단의 아픈 역사가 남.북 이산가족들의 상봉에서 금강산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는데 너무나 실리와 명분으로 치닫지 말고 이산가족들의 서러운 눈물이 끝나기를 바라며 좌파.우파 색깔론으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생산의 에너지로 바뀌어서 세계적으로 우뚝 솟는 나라로 거듭나서 우리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진정한 바램을 가져본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금기시 되는 여순사건은 무거운 주제로서 소설에서도 사건의 중요성에비해 작품에 많이 나타나지 않은 못다한 이야기를 이번 탐방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항상 역사란 권력을 가진 자의 시각에서 기술되는 예가 많았기에 우리는 폭도들의 반란으로 알았고 그 사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면도 많다. 불순분자들의 폭동으로만 알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정작 가장 고통받고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어간 양민들을 생각하면 이제는 우리가 여순사건을 금기시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공론화되어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품을 것은 품어서 하나의 통일로 가는 촉매제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그래서 그 유족들의 한이 풀어 질 때 이 나라가 진정한 민주국가로 거듭 날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함께 동행해서 열심히 강의로 수고하신 한만수교수님, 그리고 세월에 인연따라 길위에서 만나서 함께한 선생님들, 그리고 관계기관 여러분, 진행요원으로 수고가 많으신 진상훈대표님 이하 여러 진행요원들 분께 감사드립니다. “명품 인문열차”가 우리의 문학작품을 통해 인문적 가치를 좀더 깊이 성찰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우리 역사의 잘못된 편견을 일깨워주고 사고의 지평을 열어 주는 인문학의 발전소가 되어 진정한 명품으로 계속 달리기를 바라면서....

    김옥란 2018.11.13

  • 만해 한용운의 시 세계로 들어가 본다. ~ 횡설수설 ~

    만해 한용운의 시 세계로 들어가 본다. ~ 횡설수설 ~

    만해 한용운의 시 세계로 들어가 본다. ~ 횡설수설 ~   만해 한용운이 속한 문학세대는 어땠을까 ? 그 시대의 문학가들은 평균수명 40세에서 20대 정도의 세대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만해는 당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지만 기념비적(game changer)으로 시집; “님의침묵1926”,이 발표되었다는 도서관강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강사 유성호 교수님은 "인문열차 삶을 달린다" 속에서 만해의 세계를 제시한다.   언어란 무엇인가 ? 우리에게는 남는 언어로 기억될뿐 실제 이루어지는 그 삶 자체는 이미 지나감으로써 휘발성이 있다. 다만 그의 작품 내지 그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자에게는 그 언어형식이 매개체로 되어 당해 환경과 의미가 더 기억될 것이다.   여기서 언어 기록의 중요성을 생각해 본다. 개인 내면의 고백내용을 알지 못하는 말과 그 내용을 기재한 사람들에게는 이후 기록매개체에 의해서만 떠오르는 기억이 의미를 가질수 있다. 따라서 현대에는, 예컨대 유명한 이육사에 대해서는 혁명가로서 역사학자들은 보지만 일반 시민들은 기록매체의 영향으로 시인으로서 문학가를 알고 있을 뿐이다. 한편 오늘날 언어기록매체 수단중 유튜브 등의 SNS수단의 기록도 기념하는 것을 전해주는 중요성을 고려 했지만 한계가 있다. 그 중요한 부분으로는 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삶 속에서 반복되는 기록은 내면화된 언어의 용어가 되므로 꺼리낌없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삶 속에서 언어 예컨대 인연 십자가 같은 용어와 같이 내면화되지만 실제로는 기록매체나 기억된 분야에서 쓰고 있을때에 그 의미가 중요하다.   [ 나룻배와 행인 ] 나룻배에 강요하는 행인이라는 시(poem) 세계의 구조를 보면 어떨까 ? 나룻배는 어떤 일 또는 서비스와 물건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대체로 수동적일 수 밖에 없어 불만을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너(행인)에게 맡긴다는 불가피한 침묵속으로 가고, 행인은 나룻배에 대해 주체적으로 불가역 명령을 주는 침묵에서, 과연 공통 상식과 정의가 제대로 있는가 ? 나룻배와 행인은 헛되이 덧 없음이 가는 길에 서있는 관계일수 밖에 없을까 ? 나룻배와 행인간 관계의 고유구조를 틀어서 본다면 사회조직속에 구성하는 각각의 큰 프레임 안에 갖혀서 뭐라고 부르지만 각 개인은 큰 프레임에서 밖으로 경계를 넘어 나가서 놀고 있을 뿐이다. 그저 놀다가 프레임에 오든 안 오든 멀리 떠나든 그저 정적으로 지켜만 보는 공간존재일뿐일까,,,,  [알 수가 없어요] 님은 알 수 없어요? 그 시선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공간(스페이스)으로 본다면 스페이스 속에서 개개인은 특별한 모습으로 투영되는 관계로 존재한다. 그 모습은 알 수 없어요 란 표현이고 뒤집어 말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다라는 정도 범위 내에서 우리가 선택 결정을 하게 된다. 그 선택 결정은 화성으로 잠깐 사라지지만 그것을 기록하고 암기한다면 알 수 없다는 그것이 구체화되는 실제적으로 기대하고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임선규 2018.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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