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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복사 저포기],[최척전], [춘향전]의 고향인 남원을 다녀와서

    [만복사 저포기],[최척전], [춘향전]의 고향인 남원을 다녀와서

    [만복사저포기]와 [춘향전], [최척전]이 탄생된 소설의 고향 남원을 다녀와서                  < 여           는          글> 새벽부터 마른대지를 적시는 고맙고 감사한 봄비가 집을 나서는 여행길에는 약간의 번거로움도 있지만 그동안 미세번지와 황사로 인해 사람이나 수목들도 몸살을 알게 한 공기를 말끔히 씻어 주니 고맙고 감사하다. 봄비로 깨끗해진 나뭇잎들과, 봄꽃들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이 한층 눈을 행복하게 해주었고 연초록으로 단장한 어린 나무 잎들이 비를 맞으며 속살거리는 듯 앙징 맞은 예쁜 모습이 만물이 소생하는 이 계절에 함초롬이 어우러져 길 떠나는 설램을 더해 주었다. 우아한 여인네처럼 수줍게 피어 있는 자목련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일락꽃의 배웅을 받으며 만남의 장소인 용산역으로 향했다. 우리일행은 KTX을 타고 김시습의 작품 금오신화중에 [만복사저포기]와, 18세기의 사랑이 21세기인 지금도 회자되는 [춘향전]과 전란으로 인해 헤어진 이산가족이 극적으로 상봉하는 이산가족 상봉기라고 할 수 있는 [최적전]이 탄생한 소설의 고향인 남원을 향해 출발했다. 곰살맞게 오는 봄비로 차창 밖의 풍경은 우리 마음을 더욱 차분하게 해주고 오밀조밀한 우리 산야는 늘 애미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품어 주고 논과 밭은 농부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정겨운 봄 풍경들이 목가적으로 나른한 행복감을 주어 동행자들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마저 정답게 들렸다. 소설 [만복사저포기]와 소설 [최척전]의 배경이 된 지금은 오층석탑과, 석좌, 당간지주, 석물입상 석인상등 유물과 초석만이 남아 있는 만복사지절터 남원역에 도착해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첫 번 째 탐방지인 만복사지로 향했다. 만복사지는 고려 문종 때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 만복사의 터로 조선중기까지 번창하던 사찰이었다. 그 당시 스님들이 300여명이 거처하는 규모가 큰 절이었다고 한다. 남원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곳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근처 남원성에서 56.000명의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패하여 이곳 만복사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될 때 소실되었고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2층법당과 오층 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근래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식 배치였다고 한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석탑과, 돌, 유물 ,몇 개와 큰 규모의 당간지주에서 그 옛날 웅장했던 옛 사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현재 절터에는 초록융단을 깔아 놓은 듯 녹색 초지위에 고려시대 5층석탑과, 석좌, 당은 절에서 행사를 치를 때 문앞에 내걸던 일종의 깃발로 거기에는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러한 깃발의 깃대를 바치기 위해 세운 버팀기둥인 당간지주, 천년의 세월을 한결 같이 인자한 미소로 바위에 부처의 서있는 모습을 조각한 석조여래입상, 유물과, 초석,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석인상이 그 때 탁발승들을 맞이 한것 처럼 우리 탐방객들을 맞이 했다. 비오는 절터지 뒤 쪽으로는 기린산이 있고 앞으로는 수묵화를 채색한 듯한 운무에 신비감을 자아내는 지리산자락 산줄기들이 마주보며 옹기종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같이 있어서 민초들의 삶과 함께 해온 그들의 신앙과 믿음의 고향인 가람인것 같았다. 아마도 전란속에서 민초들의 고달팠던 삶을 어루만져 주었던 그래서 [만복사 저포기]가 이곳을 배경으로 쓰였는데 이 소설의 대략의 줄거리는 남원의 총각 양생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에서 방을 얻어 외롭게 지냈는데 배필 없음을 슬퍼 하던 중에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해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처녀를 얻었다. 그 처녀는 왜구의 난중에 부모와 이별하고 정절을 지키며 3년간 궁벽한곳에 묻혀서 있다가 배필을 구하던 터였다. 둘은 부부관계를 맺고 며칠간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양생은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났다. 여기서 양생은 자기와 사랑을 나눈 여자가 3년 전에 죽은 그 집 딸의 혼령임을 알았다. 여자는 양생과 더불어 부모가 베푼 음식을 먹고 나서 저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사라졌다. 양생은 홀로 귀가했다. 어느날 밤에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은 타국에 가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당신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고 했다.양생은 여자를 그리워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지냈다. 그 후로는 소식이 끊겼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소설 [최척전]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전란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졌던 최척이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이산가족상봉기라고 할 수 있다. 전쟁속에서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은 그 시대의 조상들이 남의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자기의 꿈을 실현시켜 보고자 했던 절절한 심정이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 조위한은  최척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인 상상을 바탕으로 한편의 소설을  완성 시켰는데 개인의 삶을 강조하기 위해 평범한 민초들의 삶과 인물들의  삶에 녹아든 역사적 사실들 결함이 있어 더욱 친근한 고마운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연대등 17세기에 이러한 글로벌한 소설이 탄생 되었음에 놀라움을 금 할 수없었다. 시공간의 변화는 이소설의 스케일을 크게 해주었고 독자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어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공동체가 경험한 삶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중국에서 작은 아들, 며느리와 함께 남편과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소중한 인연의 배를 띄워 조선으로 가는 모습에서 같은 여자로서 큰 울림을 주는 아름답고 소중한 고전이었다. 이소설이 만복사와 인연이 되는 것은 이소설의 여주인공인 옥영이가 삶의 죽을 고비를 만날 때 마다 만복사에 장륙불이 꿈에 나타나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죽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 민초들의 믿음이고 종교였던 불교의 역할이 컸음을 짐작해 본다. 빈 절터를 바라보며 그 때의 양생의 마음과 민초들의 도탄에 빠진 삶을 생각해보며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영원한 패자도 영원한 승자도 없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에 항상 상처받고 고단한 삶을 사는 것은 민초들의 몫인것 같아 애잔한 마음이 든다. 이 만복사지가 복원이 되어서 옛날의 융성했던 자태를 찾고 뭇 중생들의 마음의 기도처가 되기를 소원해 보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있는 지리산 흑돈 매운 갈비찜을 먹으러 황산토종정육식당으로 갔다.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른 것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인 황산대첩비> 맛있는 갈비찜을 먹고 빗속에서 한폭의 수목화로 변한 지리산 자락의 운무를 감상하며 그 당시의 피로 물들었을 대 참상의 현장을 보러 대승을 기념한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황산대첩비는 고려 말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의 터로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왜군은 1380년 8월에는 진포[금강 입구]에 5백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침입 한 뒤 충청·전라·경상 삼도의 연안 지방을 약탈하고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이 때에 원수 나세와 최무선 등이 화통과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 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1376년(우왕 2) 홍산에서 최영에게 대패한 왜군은 1378년 5월 지리산 방면으로 다시 결집하게 되는데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순찰사로 임명하여 이 지방의 방위 책임을 맡게 하였다. 왜군은 함양과 운봉 등의 험지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하였다. 이성계는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왜군이 주둔해 있던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뜨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이 글을 쓰고 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는데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는 보호각을 세웠다. 1977년에 비각을 건립하고 파괴된 비석 조각을 모아 안치해서 파비각을 만들었다. 황산대첩사적비는 고종19년 운봉 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 비각비를 1958년에 중건한 비이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철저히 조선의 혼까지도 말살하려고 저지른 일제의 만행을 그려보며 아직도 진정한 사과가 없는 그들의 후손들을 보면서 민족의 DNA는 뿌리내림이 아닌가 싶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낸 역사의 승리감도 있지만 빗발이 더욱 굵어져 지리산으로부터 내려온 물들이 람천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며 그 때의 참상을 그려보며 아마도 람천의 물이 핏물이 되어 흐르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며 왜 인간들은 이렇게 죽이고 죽는 역사를 만들어 가야만 하는지 애석한 마음이 든다.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하고 불순종의 죄성을 가진 우리는 이렇듯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이렇듯 많은 슬프고 참혹한 댓가를 치러야만 하는지 만감이 교차하면서 이렇듯 승리의 앞장선 장수나 관리들의 숭고한 희생은 부각되어 지금까지도 역사에 회자 되지만 당시의 척박한 땅에서 전쟁과굶주림속에서 희생이 된 민초들의 굴곡진 삶의 모습들은 이렇듯 문학에서 회자 되는것을 보면서 문학의 사회적기능이 얼마나 크며 값진 것인 것을 느끼며 박수를 보내고 싶다.       < 동편제를 완성시킨 국악의 성지 가왕 송홍록의 생가> 국악의 가왕인 송흥록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음악의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태어나 소리는 극히 청미하며 성량이 풍부하였고부친이 한 두 번 선창을 하면 그대로 방창하였다고 한다. 12세 때 백운산으로 들어가 소리공부에 전념하고 밤이면 글을 배우며 입산한 지 5년만에 소리를 터득하였다. 또한 소리를 정리하고 집대성하였으며 10년만에 득음대성하였다. 철종은 이런 송흥록에게 정삼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중국의 시중천자 이태백에 비유하기도 하며 당시의 모든 판소리를 집대성하여 한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로 발전시켰으며 동편제 창법을 창시하여 판소리의 중시조로 추앙을 받았다. 그의 공적으로는 계면조의 완성과, 진양조의 완성, 경상도 민요의 메나리조를 전라도의 무가와 민요의 선율에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판소리가 전라도의 지역성을 벗어나 민족예술로서의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생가 앞으로 흐르는 람천 주변으로 피어 있는 화사한 벚꽃이 우리를 맞았다.가슴의 한이 없으면 득음을 할 수 없다는 창은 삶의 자죽마다 전쟁과 죽음이공존했던 이곳 예향 남원에서는 자연스레 민초들의 삶에 배인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 자체가 고통이었고 고단했던 민초들이 글은 모르고 이렇게 자신의 한과 서러움을 소리로 공감하고 위로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귀곡성으로 유명한 동편제 판소리의 길을 연 송흥록이 비전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이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동편제의 가왕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 선생의 출생지가 비전마을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생가로 들어서니 음원으로 녹음된 판소리가 애끓는 가락으로 우리를 반겼다.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생가지의 정겨운 초가지붕과 돌로 만든 우물과 초가집앞에 심겨진 앵두나무가 어릴 적 고향마을을 상기시켜주어서 잠깐이나마 향수를 달래주었다. 전쟁으로 만명이 훨씬 넘는 조선인과 왜군들의 억울한 영혼들이 떠돌아 다니는 산 아래 시냇가 마을에서 태어나 귀신의 음혼과 함께 살았다고 할 수 있으니 귀신 소리를 잘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송흥록의 소리는 고수를 맡던 아우 송광록에게 이어졌고 송광록은  송우룡, 송만갑, 송기덕으로 대를 내리면서 소리를 이어갔다.이렇게 남원의 판소리는 전승되었다. 운봉 들판을 가로 지르는 광천이 인월에서 풍천과 만나 람천이 되어 지리산 자락의물줄기를 합쳐 엄천강이 되고 이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 남해바다로 가는 것을 보며 왜구들이 왜 이곳 남원에 결집했는지를 알 수 있을것 같았다.구슬픈 가락과 수많은 세월속에서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있는 주변의 자연을 뒤로 하고 단일 사찰로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호국불교로 나라 사랑이 넘쳤던 구산선문의 최초의 가람인 실상사로 향했다. <호국불교로 나라사랑이 넘쳤던 구산선문의 최초의 가람인 실상사> 지리산 천왕봉를 마주하고 자리한 이 절은 통일신라 흥덕왕 3년에 홍척스님이 처음 세웠다. 신라말기 교학보다 참선을 중시한 선종의 여러 종파가 전국 명산에 절을 세웠는데 실상사도 그중에 하나이다.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 숙종 때 건물 36동을 다시 지었으나 고종 때 화재를 당해 현재의 소규모로 복구하였다. 실상사는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한국 선불교의 위상을 드높였다.경내에는 국보인 백장암 삼층석탑을 비롯해 보물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이 절의 역사적 의의와 품격을 대변해 준다. 천왕봉을 정점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이 절 앞으로 성큼 다가와 부처님의 자비를 보이듯 포근히 감싸 안고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맑고 투명한 반선계곡 물이 속세의 번뇌을 씻어 주려는 듯 절 옆을 돌아 굽이쳐 흐르고 있다. 실상사 석장승은 실상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각품으로 원래는 4개가 있었는데 그 중 1개가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는 3개만 남았다. 석장승의 모습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 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갖는 등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같은 시기인 조선 영조 1년에 세운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귀신을 쫒는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궃기는 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해탈교를 건너니 연꽃연못이 가람의 운치를 더하고 일주문에 들어서니 사천왕상들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강사님께서 이 절의 특징은 천년고찰이며 문화재가 많은 사찰이며 일본과 관계된 전해오는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아마도 호국 사찰로서 왜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징계하고자 했던 스님들의 나라 사랑과 연관이 많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우리나라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 가는 것을 막도록 4천근의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3층 석탑을 세워 지맥을 누르게 하였다는 전설과 함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은 현종 5년(1664)에 제작되었으며,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타종시 동경을 강타하여 우리나라의 국운을 융창하게 한다는 호국사찰이다.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일제 말기에는 주지가 일본 경찰한테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의 스님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절절이 느껴진다.전해지는 이야기로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쇠하고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쇠해진다는 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사찰로 야외 박물관이 따로 없을 정도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었고 정민영 작가가 만든 실상사의 소리풍경은 잠시 앉아 명상을 즐겨도 좋은 공간이었다. 현대 시각으로 재해석한 솟대의 모습등 실상사 경내에는 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조형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비내리는 산사의 운치를 뒤로 하고 우리는 18세기의 청춘남녀의 사랑이 21세기인 지금도 회자되는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의 백년가약을 맺은 광한루로 발길을 향했다.  <사랑 사랑 내사랑 어화 둥둥 내사랑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놀이터 인 광한루> 춘향전으로 한층 유명해진 광한루는 원래 세종 조 황희가 남원으로 유배와서 세웠다는 누각이다. 전쟁 등으로 개보수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누각의 이름을 처음에는 광통이라고 했다가 후에 정인지가 광한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광한은 옥황상제가 산다는 천상에 있는 공간이다. 신선세계의 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늘나라 월궁을 광한루라 하였고 그 아래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와 오작교를 놓았으며 신선들이 산다는 전설속의 삼신산을 연못 가운데 조성하여 전체적인 구성이 천체우주를 상징한다.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구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에 들 정도로 만듦새가 뛰어나다. 선조 때 남원부사 장의국이 요천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광한루 전면 동서 양편에평호를 만들어 은하수를 상징하게 하였으며 못 안에는 삼신도를 만들어 한섬(방장섬)에는 대나무를 또 한 섬(봉래섬)에는 백일홍을 심고 나머지 한 섬(영주섬)에는 연정을 지었다. 또 가운데에는 하화를 심고 못을 가로지르는 오작교을 놓았다. 연못을 앞에 둔 누각으로 마루주위에 난간을 둘렀고 본채 동쪽에 연접된 두 칸의 부속건물은 정조 때 증축한 것이다. 기둥위의 공포양식이 주심포집에 다포집 계통을 절충한 특수한 건물인데 건축양식보다춘향과 이도령의 아름다운 인연이 얽힌 전설적인 누각으로 더 알려져 있다. 광한전은 원래 옥황상제가 사는 곳인데 이 고을에 온 부사들이나 한량들이 별세계의 이름을 붙이고 이곳 광한루에서 일상의 쉼을 가지고 시를 짓거나 풍류를 즐겼으며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원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관청이 주관하여 조성한 정원으로서 단아하고 정결한 멋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완월정, 춘향사당, 춘향관, 월매집, 그네, 전통놀이 체험장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을 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 광한루원에 들어서니 춘향가의 한 대목인 사랑가가 우리를 맞이했다. 정말로 봄날에 춘정을 느끼고 사랑의 로맨스가 싹틀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오작교 다리 밑에 양 연못에는 원앙이 짝을 지어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과 질세라 꼭붙어서 한가로이 헤엄을 치고 연못속에 잉어들이 노니는 모습을 보며 소설 춘향전의청춘 남녀가 노는 모습과 겹치면서 나 또한 젊은 시절에 사랑에 몸살을 앓았던 기억에 아련함과 그리움이 느껴졌다. 소설 춘향전의 정확한 창작시기와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영조, 정조 시대에 생성되어 근대 계몽기를 거치며 현재의 춘향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러 전래 설화들이 합쳐져 판소리 춘향가로 발전하였고 판소리 사설이 소설로 각색되어전해지고 있다. 즉 설화-판소리-소설의 변이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춘향전은 조선시대 이팔청춘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을 하고 신분이라는장벽에 의해 헤어 졌다가 다시 극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 한편의 절절한  사랑이야기 입니다. 신선의 정원에서 운명을 만난 성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우리를 울게 하고 웃게 하며 그 속에서 한바탕 신나는 감정의 유희를 펼쳐 볼 수 있게 합니다. 춘향전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로 너무나 낯익은 이야기이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특정한 작가 없이 판소리에서 발달된 소설 <춘향전>은 옮기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기도 했는데 그중 완판본 춘향전은 전라도 지방의 판본인 <열녀춘향수절가>이다. 18세기의 소녀로서 21세기 에도 회자되는 목숨을 건 춘향의 사랑은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가치입니다 이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춘향은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를 통해 현대의 캐릭터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신분차별이 엄격했던 시대에 양반과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격차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이겨낸 춘향은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춘향전의 내용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춘향전의 매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출할 수 있습니다. 춘향전은 춘향과 이몽룡의 러브 스토리에 국한되지 않고 신분제의 질곡 대한 거부와 변학도의 폭정에 대한 항거에 초점을 맞추면, 춘향전은 전근대 시대의 모순에 저항하는 문학작품이 됩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하다는점 그리고 폭넓은 변주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춘향전은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줄길 수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춘향전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추구하는 당시 서민들의 꿈과 정서가 담긴 작품으로 고전소설의 최대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맺     음     말> 우리의 빛나는 고전을 읽고 그에 준하는 내용의 강연을 듣고 책속에서 읽었던 모습들을 현장속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길위의 인문학 여행은 신중년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진 나에게는 행복한 호사다. 인문열차를 타고 [만복사 저포기], [최척전], [춘향전] 소설이 태어난 고향 남원을 찾아와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탐방 장소를 둘러 보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민초들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 없고 공은 권력을 가진 자와 힘의 논리의 지배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그래도 이러한 민초들의 애환을 보듬어 주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큼을 알 수 있는 고맙고 소중한 여행이었다. 역사란 인간이 써내려 가는 각본 없는 드라마지만 건조한 지식으로만 받아 들이지 않고 가슴으로 한결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이번 인문학 기행은 보람 되고 뿌듯했다. 인문학 여행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고 역사와, 문학, 자연과의 만남은 무엇보다도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는데 자신의 삶을 재인식하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나 자신을 반추해 보는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만물이 소생하여 아름다운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사월에 우리의 뿌리를 알고 역사를 사랑하는 인문열차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우중에도 강의를 해주신 강사님과 도서관의 사무관님 진행을 맡아 주신 안우상 팀장님이하 쏙쏙직원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문열차가 영원한 인문학의 발전소가 되기를 바라며!                                     인문열차 화이팅!!!

    김옥란 2018.04.18

  • [만복사저포기],[최척전], [춘향전]의 고향인 남원을 다녀와서

    [만복사저포기],[최척전], [춘향전]의 고향인 남원을 다녀와서

    만복사저포기와 춘향전, 최척전이 탄생된 소설의 고향 남원을 다녀와서>                 < 여           는          글> 새벽부터 마른대지를 적시는 고맙고 감사한 봄비가 집을 나서는 여행길에는약간의 번거로움도 있지만 그동안 미세번지와 황사로 인해 사람이나 수목들도몸살을 알게 한 공기를 말끔히 씻어 주니 고맙고 감사하다. 봄비로 깨끗해진 나뭇잎들과, 봄꽃들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이 한층 눈을 행복하게 해주었고 연초록으로 단장한 어린 나무 잎들이 비를 맞으며 속살거리는 듯 앙징 맞은 예쁜 모습이 만물이 소생하는 이 계절에 함초롬이 어우러져 길 떠나는 설렘을 더해 주었다. 우아한 여인네처럼 수줍게 피어 있는 자목련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라일락꽃의 배웅을 받으며 만남의 장소인 용산역으로 향했다. 우리일행은 KTX을 타고 김시습의 작품 금오신화중에 [만복사저포기]와, 18세기의 사랑이 21세기인 지금도 회자되는 [춘향전]과 전란으로 인해 헤어진 이산가족이 극적으로 상봉하는 이산가족 상봉기라고 할 수 있는 [최적전]이 탄생한 소설의 고향인남원을 향해 출발했다. 곰살맞게 오는 봄비로 차창 밖의 풍경은 우리 마음을 더욱 차분하게 해주고 오밀조밀한 우리 산야는 늘 에미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품어주고 논과 밭은 농부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정겨운 봄 풍경들이 목가적으로 나른한 행복감을 주어 동행자들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마저 정답게 들렸다. <소설 [만복사저포기]와 소설 [최척전]의 배경이 된 지금은 오층석탑과, 석좌, 당간지주, 석물입상 석인상등 유물과 초석만이 남아 있는 만복사지절터 > 남원역에 도착해 우리 일행을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 첫 번 째 탐방지인 만복사지로 향했다. 만복사지는 고려 문종 때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 만복사의 터로 조선중기까지 번창하던 사찰이었다. 그 당시 스님들이 300여명이 거처하는 규모가 큰 절이었다고 한다. 남원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곳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근처 남원성에서 56.000명의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패하여 이곳 만복사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될 때 소실되었고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2층법당과 오층 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근래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식 배치였다고 한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석탑과 돌 유물 몇 개와 큰 규모의 당간지주에서 그 옛날 웅장했던 옛 사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현재 절터에는 초록융단을 깔아 놓은 듯 녹색 초지위에 고려시대 5층석탑과, 석좌, 당은 절에서 행사를 치를 때 문앞에 내걸던 일종의 깃발로 거기에는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러한 깃발의 깃대를 바치기 위해 세운 버팀기둥인 당간지주, 천년의 세월을 한결 같이 인자한 미소로 바위에 부처의 서있는 모습을 조각한 석조여래입상, 유물과, 초석,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석인상이 그 때 탁발승들을 맞이 한것 처럼 우리 탐방객들을 맞이 했다. 비오는 절터지 뒤 쪽으로는 기린산이 있고 앞으로는 수묵화를 채색한 듯한 운무에신비감을 자아내는 지리산자락 산줄기들이 마주보며 옹기종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같이 있어서 민초들의 삶과 함께 해온 그들의 신앙과 믿음의 고향인 가람인것 같았다. 아마도 전란속에서 민초들의 고달팠던 삶을 어루만져 주었던 그래서 [만복사 저포기]가 이곳을 배경으로 쓰였는데 이 소설의 대략의 줄거리는 남원의 총각 양생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에서 방을 얻어 외롭게 지냈는데 배필 없음을 슬퍼 하던 중에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해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처녀를 얻었다. 그 처녀는 왜구의 난중에 부모와 이별하고 정절을 지키며 3년간 궁벽한곳에 묻혀서 있다가 배필을 구하던 터였다. 둘은 부부관계를 맺고 며칠간 열열한 사랑을 나누었다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양생은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났다. 여기서 양생은 자기와 사랑을 나눈 여자가 3년 전에 죽은 그 집 딸의 혼령임을 알았다. 여자는 양생과 더불어 부모가 베푼 음식을 먹고 나서 저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사라졌다. 양생은 홀로 귀가했다. 어느날 밤에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은 타국에 가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당신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고 했다.양생은 여자를 그리워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지냈다.그 후로는 소식이 끊겼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소설 [최척전]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서 전란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졌던 최척이 가족들과 다시 만나는 이산가족상봉기라고 할 수 있다. 전쟁속에서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은 그 시대의 조상들이 남의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자기의 꿈을 실현시켜 보고자 했던 절절한 심정이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 조위한은 최척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인 상상을 바탕으로 한편의 소설을 완성 시켰는데 개인의 삶을 강조하기 위해 평범한 민초들의 삶과 인물들의 삶에 녹아든 역사적 사실들 결함이 있어 더욱 친근한 고마운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연대등 17세기에 이러한 글로벌한 소설이 탄생 되었음에 놀라움을 금 할 수없었다. 시공간의 변화는 이소설의 스케일을 크게 해주었고 독자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어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공동체가 경험한 삶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중국에서 작은 아들, 며느리와 함께 남편과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소중한 인연의 배를 띄워 조선으로 가는 모습에서 같은 여자로서 큰 울림을 주는 아름답고 소중한 고전이었다. 이소설이 만복사와 인연이 되는 것은 이소설의 여주인공인 옥영이가 삶의 죽을 고비를 만날 때 마다 만복사에 장륙불이 꿈에 나타나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죽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 민초들의 믿음이고 종교였던 불교의 역할이 컸음을 짐작해 본다. 빈 절터를 바라보며 그 때의 양생의 마음과 민초들의 도탄에 빠진 삶을 생각해보며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영원한 패자도 영원한 승자도 없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에 항상 상처받고 고단한 삶을 사는 것은 민초들의 몫인것 같아 애잔한 마음이 든다. 이 만복사지가 복원이 되어서 옛날의 융성했던 자태를 찾고 뭇 중생들의 마음의 기도처가 되기를 소원해 보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맛있는 지리산 흑돈 매운 갈비찜을 먹으러 황산토종정육식당으로 갔다.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른 것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인 황산대첩비> 맛있는 갈비찜을 먹고 빗속에서 한폭의 수목화로 변한 지리산 자락의 운무를 감상하며 그 당시의 피로 물들었을 대 참상의 현장을 보러 대승을 기념한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황산대첩비는 고려 말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의 터로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왜군은 1380년 8월에는 진포[금강 입구]에 5백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침입 한 뒤 충청·전라·경상 삼도의 연안 지방을 약탈하고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이 때에 원수 나세와 최무선 등이 화통과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 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1376년(우왕 2) 홍산에서 최영에게 대패한 왜군은 1378년 5월 지리산 방면으로 다시결집하게 되는데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순찰사로 임명하여 이 지방의 방위 책임을 맡게 하였다. 왜군은 함양과 운봉 등의 험지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하였다. 이성계는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왜군이 주둔해 있던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뜨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입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이 글을 쓰고 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세웠으나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는데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는 보호각을 세웠다. 1977년에 비각을 건립하고 파괴된 비석 조각을 모아 안치해서 파비각을 만들었다. 황산대첩사적비는 고종19년 운봉 현감 이두현이 세웠던 화수산 비각비를 1958년에 중건한 비이다. 비문에는 황산대첩 전황과 비각건립 취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철저히 조선의 혼까지도 말살하려고 저지른 일제의 만행을 그려보며 아직도 진정한 사과가 없는 그들의 후손들을 보면서 민족의 DNA는 뿌리내림이 아닌가 싶다. 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낸 역사의 승리감도 있지만 빗발이 더욱 굵어져 지리산으로부터 내려온 물들이 람천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며 그 때의 참상을 그려보며 아마도 람천의 물이 핏물이 되어 흐르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며 왜 인간들은 이렇게 죽이고 죽는 역사를 만들어 가야만 하는지 애석한 마음이 든다.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하고 불순종의 죄성을 가진 우리는 이렇듯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이렇듯 많은 슬프고 참혹한 댓가를 치러야만 하는지 만감이 교차하면서 이렇듯 승리의 앞장선 장수나 관리들의 숭고한 희생은 부각되어 지금까지도 역사에 회자 되지만 당시의 척박한 땅에서 전쟁과굶주림속에서 희생이 된 민초들의 굴곡진 삶의 모습들은 이렇듯 문학에서 회자 되는것을 보면서 문학의 사회적기능이 얼마나 크며 값진 것인 것을 느끼며 박수를 보내고 싶다. < 동편제를 완성시킨 국악의 성지 가왕 송홍록의 생가> 국악의 가왕인 송흥록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음악의 천부적인 재질을 가지고 태어나 소리는 극히 청미하며 성량이 풍부하였고부친이 한 두 번 선창을 하면 그대로 방창하였다고 한다. 12세 때 백운산으로 들어가 소리공부에 전념하고 밤이면 글을 배우며 입산한 지 5년만에 소리를 터득하였다. 또한 소리를 정리하고 집대성하였으며 10년만에 득음대성하였다. 철종은 이런 송흥록에게 정삼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중국의 시중천자 이태백에 비유하기도 하며 당시의 모든 판소리를 집대성하여 한 차원 높은 예술의 경지로 발전시켰으며 동편제 창법을 창시하여 판소리의 중시조로 추앙을 받았다. 그의 공적으로는 계면조의 완성과, 진양조의 완성, 경상도 민요의 메나리조를 전라도의 무가와 민요의 선율에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판소리가 전라도의 지역성을 벗어나 민족예술로서의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생가 앞으로 흐르는 람천 주변으로 피어 있는 화사한 벚꽃이 우리를 맞았다.가슴의 한이 없으면 득음을 할 수 없다는 창은 삶의 자죽마다 전쟁과 죽음이공존했던 이곳 예향 남원에서는 자연스레 민초들의 삶에 배인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 자체가 고통이었고 고단했던 민초들이 글은 모르고 이렇게 자신의 한과 서러움을 소리로 공감하고 위로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귀곡성으로 유명한 동편제 판소리의 길을 연 송흥록이 비전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이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동편제의 가왕이라 일컫는 송흥록과 송만갑 선생의 출생지가 비전마을이고 명창 박초월이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생가로 들어서니 음원으로 녹음된 판소리가 애끓는 가락으로 우리를 반겼다.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생가지의 정겨운 초가지붕과 돌로 만든 우물과 초가집앞에 심겨진 앵두나무가 어릴 적 고향마을을 상기시켜주어서 잠깐이나마 향수를 달래주었다. 전쟁으로 만명이 훨씬 넘는 조선인과 왜군들의 억울한 영혼들이 떠돌아 다니는 산 아래 시냇가 마을에서 태어나 귀신의 음혼과 함께 살았다고 할 수 있으니 귀신 소리를 잘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송흥록의 소리는 고수를 맡던 아우 송광록에게 이어졌고 송광록은  송우룡, 송만갑, 송기덕으로 대를 내리면서 소리를 이어갔다.이렇게 남원의 판소리는 전승되었다. 운봉 들판을 가로 지르는 광천이 인월에서 풍천과 만나 람천이 되어 지리산 자락의물줄기를 합쳐 엄천강이 되고 이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 남해바다로 가는 것을 보며 왜구들이 왜 이곳 남원에 결집했는지를 알 수 있을것 같았다.구슬픈 가락과 수많은 세월속에서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있는 주변의 자연을 뒤로 하고 단일 사찰로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호국불교로 나라 사랑이 넘쳤던 구산선문의 최초의 가람인 실상사로 향했다. <호국불교로 나라사랑이 넘쳤던 구산선문의 최초의 가람인 실상사> 지리산 천왕봉를 마주하고 자리한 이 절은 통일신라 흥덕왕 3년에 홍척스님이 처음 세웠다. 신라말기 교학보다 참선을 중시한 선종의 여러 종파가 전국 명산에 절을 세웠는데 실상사도 그중에 하나이다.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 숙종 때 건물 36동을 다시 지었으나 고종 때 화재를 당해 현재의 소규모로 복구하였다. 실상사는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한국 선불교의 위상을 드높였다.경내에는 국보인 백장암 삼층석탑을 비롯해 보물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이 절의 역사적 의의와 품격을 대변해 준다. 천왕봉을 정점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자락이 절 앞으로 성큼 다가와 부처님의 자비를 보이듯 포근히 감싸 안고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맑고 투명한 반선계곡 물이 속세의 번뇌을 씻어 주려는 듯 절 옆을 돌아 굽이쳐 흐르고 있다. 실상사 석장승은 실상사로 들어가는 초입에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각품으로 원래는 4개가 있었는데 그 중 1개가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는 3개만 남았다. 석장승의 모습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 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갖는 등 비슷한 양식을 보인다.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같은 시기인 조선 영조 1년에 세운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귀신을 쫒는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궃기는 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해탈교를 건너니 연꽃연못이 가람의 운치를 더하고 일주문에 들어서니 사천왕상들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강사님께서 이 절의 특징은 천년고찰이며 문화재가 많은 사찰이며 일본과 관계된 전해오는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아마도 호국 사찰로서 왜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징계하고자 했던 스님들의 나라 사랑과 연관이 많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우리나라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 가는 것을 막도록 4천근의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3층 석탑을 세워 지맥을 누르게 하였다는 전설과 함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은 현종 5년(1664)에 제작되었으며,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타종시 동경을 강타하여 우리나라의 국운을 융창하게 한다는 호국사찰이다.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일제 말기에는 주지가 일본 경찰한테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의 스님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 절절이 느껴진다.전해지는 이야기로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쇠하고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쇠해진다는 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사찰로 야외 박물관이 따로 없을 정도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었고 정민영 작가가 만든 실상사의 소리풍경은 잠시 앉아 명상을 즐겨도 좋은 공간이었다. 현대 시각으로 재해석한 솟대의 모습등 실상사 경내에는 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조형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비내리는 산사의 운치를 뒤로 하고 우리는 18세기의 청춘남녀의 사랑이 21세기인 지금도 회자되는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의 백년가약을 맺은 광한루로 발길을 향했다. <사랑 사랑 내사랑 어화 둥둥 내사랑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놀이터인 광한루> 춘향전으로 한층 유명해진 광한루는 원래 세종 조 황희가 남원으로 유배와서 세웠다는 누각이다. 전쟁 등으로 개보수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누각의 이름을 처음에는 광통이라고 했다가 후에 정인지가 광한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광한은 옥황상제가 산다는 천상에 있는 공간이다. 신선세계의 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늘나라 월궁을 광한루라 하였고 그 아래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와 오작교를 놓았으며 신선들이 산다는 전설속의 삼신산을 연못 가운데 조성하여 전체적인 구성이 천체우주를 상징한다.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구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에 들 정도로 만듦새가 뛰어나다. 선조 때 남원부사 장의국이 요천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광한루 전면 동서 양편에평호를 만들어 은하수를 상징하게 하였으며 못 안에는 삼신도를 만들어 한섬(방장섬)에는 대나무를 또 한 섬(봉래섬)에는 백일홍을 심고 나머지 한 섬(영주섬)에는 연정을 지었다. 또 가운데에는 하화를 심고 못을 가로지르는 오작교을 놓았다. 연못을 앞에 둔 누각으로 마루주위에 난간을 둘렀고 본채 동쪽에 연접된 두 칸의 부속건물은 정조 때 증축한 것이다. 기둥위의 공포양식이 주심포집에 다포집 계통을 절충한 특수한 건물인데 건축양식보다춘향과 이도령의 아름다운 인연이 얽힌 전설적인 누각으로 더 알려져 있다. 광한전은 원래 옥황상제가 사는 곳인데 이 고을에 온 부사들이나 한량들이 별세계의 이름을 붙이고 이곳 광한루에서 일상의 쉼을 가지고 시를 짓거나 풍류를 즐겼으며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원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관청이 주관하여 조성한 정원으로서 단아하고 정결한 멋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완월정, 춘향사당, 춘향관, 월매집, 그네, 전통놀이 체험장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을 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 광한루원에 들어서니 춘향가의 한 대목인 사랑가가 우리를 맞이했다. 정말로 봄날에 춘정을 느끼고 사랑의 로맨스가 싹틀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오작교 다리 밑에 양 연못에는 원앙이 짝을 지어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과 질세라 꼭붙어서 한가로이 헤엄을 치고 연못속에 잉어들이 노니는 모습을 보며 소설 춘향전의청춘 남녀가 노는 모습과 겹치면서 나 또한 젊은 시절에 사랑에 몸살을 앓았던 기억에 아련함과 그리움이 느껴졌다. 소설 춘향전의 정확한 창작시기와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영조, 정조 시대에 생성되어 근대 계몽기를 거치며 현재의 춘향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러 전래 설화들이 합쳐져 판소리 춘향가로 발전하였고 판소리 사설이 소설로 각색되어전해지고 있다. 즉 설화-판소리-소설의 변이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춘향전은 조선시대 이팔청춘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을 하고 신분이라는장벽에 의해 헤어 졌다가 다시 극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 한편의 절절한  사랑이야기 입니다. 신선의 정원에서 운명을 만난 성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은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우리를 울게 하고 웃게 하며 그 속에서 한바탕 신나는 감정의 유희를 펼쳐 볼 수 있게 합니다. 춘향전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로 너무나 낯익은 이야기이고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특정한 작가 없이 판소리에서 발달된 소설 <춘향전>은 옮기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기도 했는데 그중 완판본 춘향전은 전라도 지방의 판본인 <열녀춘향수절가>이다. 18세기의 소녀로서 21세기 에도 회자되는 목숨을 건 춘향의 사랑은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가치입니다 이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춘향은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를 통해 현대의 캐릭터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신분차별이 엄격했던 시대에 양반과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격차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이겨낸 춘향은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춘향전의 내용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춘향전의 매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출할 수 있습니다. 춘향전은 춘향과 이몽룡의 러브 스토리에 국한되지 않고 신분제의 질곡 대한 거부와 변학도의 폭정에 대한 항거에 초점을 맞추면, 춘향전은 전근대 시대의 모순에 저항하는 문학작품이 됩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하다는점 그리고 폭넓은 변주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춘향전은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줄길 수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춘향전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추구하는 당시 서민들의 꿈과 정서가 담긴 작품으로 고전소설의 최대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맺     음     말> 우리의 빛나는 고전을 읽고 그에 준하는 내용의 강연을 듣고 책속에서 읽었던 모습들을 현장속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길위의 인문학 여행은 신중년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진 나에게는 행복한 호사다. 인문열차를 타고 [만복사 저포기], [최척전], [춘향전] 소설이 태어난 고향 남원을 찾아와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탐방 장소를 둘러 보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민초들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 없고 공은 권력을 가진 자와 힘의 논리의 지배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그래도 이러한 민초들의 애환을 보듬어 주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큼을 알 수 있는 고맙고 소중한 여행이었다. 역사란 인간이 써내려 가는 각본 없는 드라마지만 건조한 지식으로만 받아 들이지 않고 가슴으로 한결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이번 인문학 기행은 보람 되고 뿌듯했다. 인문학 여행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고 역사와, 문학, 자연과의 만남은 무엇보다도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는데 자신의 삶을 재인식하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나 자신을 반추해 보는 나를 사랑하는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만물이 소생하여 아름다운 생명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사월에 우리의 뿌리를 알고 역사를 사랑하는 인문열차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우중에도 강의를 해주신 강사님과 도서관의 사무관님 진행을 맡아 주신 안우상 팀장님이하 쏙쏙직원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문열차가 영원한 인문학의 발전소가 되기를 바라며 인문열차 화이팅!!!

    김옥란 2018.04.18

  • 한국의 나폴리에서 하루밤

    한국의 나폴리에서 하루밤

    통영은 내 추억이 깃든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가을 여행을 갔다가 남망산 공원을 오르는 길에서 야바위꾼에게 걸려서 가진 돈 다 털리고 밥은 걸식을 하고 잠은 시내 중심가 로터리 행사장에 있는 장의자에서 노숙을 하면서 가을 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추워서 한 잠도 못자고 떨면서 밤을 새웠으며 어스름한 신새벽 파출소를 발견하고는 다리야 날 살려라 하면서 숨이 차도록 뛰어서 해저터널까지 갔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 한 통영을 고희를 훨씬 지나서 다시 찾게 되니 감회가 새로워서 가슴이 설레기도 하였다. 추억을 간직한 통영을 여러 번 여행을 하였지만 이 번에는 또 새로운 의미가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인문열차를 시작하는 첫 행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용산역에서 출발한 KTX열차는 시원하게 달리며 막혔던 가슴을 확 뚫어주는 것 같았다. 가는 도중에 인문학 사랑방이라는 순서에서 책을 소개하는 행사를 하였는데 나는 최일도 목사가 쓴 ‘밥짓는 시인 펴주는 사랑’ 이라는 책을 소개하여 이광세 선생님과 함께 운좋게 선정이 되어 박경리의 ‘가을에 온 여인‘이라는 제목의 소설책을 선물로 받았다. 열차는 남쪽을 향해서 거침없는 질주를 하여 마산역에 도착하여 광장 앞에 서 있는 크고 둥근 화강암의 노산 이은상 씨의 시비에서 잠시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바로 통영으로 출발을 하여 바닷가 식당에서 생선구이로 푸짐한 식사를 하는 중에 교수님이 생선 이름을 물어보아서 내가 아는 대로 설명을 하고 서대와 박대에 대해서 서대는 남해안에 나며 검은 색에 살이 깊으나 박대는 서해안에서 잡히며 약간 붉고 말 그대로 살이 얇다는 설명에 모두 공감을 해주었다. 식사를 하고 첫 탐방지가 세병관이었다. 세병관은 다 아시다시피 삼도 수군을 통제하던 곳인데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의 저자인 박경리 선생이 어린 시절 공부를 하던 곳이라고 하여 잠시 들려보고 ‘김약국의 딸들’ 배경이 되었던 서문고개를 따라가니 박경리가 살았던 생가 터 벽에 작은 팻말 하나만이 옛 집이라는 흔적이 있을 뿐 지금은 자취를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을 느꼈다. 서문고개를 넘어서 시인 백석이 찾았다는 정당골로 내려가니 우물과 주변에 백석 시인의 통영이라는 시가 적힌 시비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백석은 멋쟁이요 테스라는 소설을 번역한 시인으로 월북을 하여 만년에 힘든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광고 문구가 머리를 스치면서 가슴이 싸해 지며 연민의 정을 느꼈다. 골목길을 따라 서피랑의 벽화를 보면서 옹기종기 지붕을 맞대고 살아가는 까꾸막 동네의 삶을 눈으로 담고 정상의 서포루에서 리아스식 해변과 한국의 나폴리라고 하는 항구의 아름다움을 한 눈에 굽어보니 그 동안 막혔던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 내리는 것 같았다. 충렬사 뜨락의 동백은 철이 지난 모습에 힘을 잃은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통영대교를 지나서 미륵산 뒤쪽 호젓한 시골 산자락에 자리를 잡은 박경리의 기념관을 둘러보고 산 중턱에 안치된 선생의 무덤으로 가는 길은 숨이 찰 정도였다. 박경리의 문학은 전반적으로 인간의 소외문제와 낭만적 사랑에서 생명사상으로 흐름이 그 기조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26년에 걸쳐 완성한 대하소설 ‘토지’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세계는 민족적 삶의 총체성을 보여주며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운명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힘으로 그리고 있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넓고 아늑한 콘도, 한국의 나폴리라고 하는 통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개운한 기분으로 새날을 맞으니 푸른 바다와 동해의 일출은 한 편의 그림이요 장관이었다. 둘째 날은 동피랑과 수산시장부터 시작하였다. 수산시장의 꼬리치며 물을 팅기는 활어들이 나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넣어주는 듯하여서 입구에서 거금을 주고 서대를 다섯 마리를 사서 힘들게 가지고 와서 오랜만에 서대 맛을 보니 옛 기억과 고향생각이 절로 났다. 청마 유치환 문학관은 최근 새로 짓는 유리벽에 거대한 현대식 건물과는 달리 박공지붕에 단정한 느낌이 들어서 좋고 문학관 옆 언덕 위에 조정한 생가는 본래 그대로는 아니지만 소박하고 정감이 들었다. 행복이라는 시에 ‘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럴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하략 이영도 작가를 사랑하여 쓴 편지는 한 때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유명한 시다. 잠시 나도 시를 감상하니 행복이 밀려오는 착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통영의 일정을 마치고 거제로 가는 동안 차 안에서 교수님이 백석의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백석의 자연관이 남다르고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로 쓴 것을 말씀하다가 어제 식당에서 서대와 박대를 설명하는 분이 계셨는데 여기 계시냐고 하여 내가 손을 들었더니 자기만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저런 분이 바로 백석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하여 듣는 사람으로서는 기분이 괜찮았다. 거제도에서는 포로수용소를 찾아가서 제법 긴 시간 동안 6,25 당시를 회상하며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특히 이승만의 포로 석방 때 한 부류는 남쪽에 남고 한 부류는 북을 선택하였으며 또 다른 한 부류는 이념 대림을 하는 남도, 북도 싫다며 제3국을 선택한 이야기를 소재로 쓴 작품이 최인훈의 ‘광장’ 이라는 작품이요, 서울 출신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있다가 북한군에 끌려 북으로 갔다가 북한군과 함께 남침을 했으며 ‘풀‘이라는 시로 유명한 김수영도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있다가 석방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당시의 복잡한 상황과 지금도 끝나지 않은 체제와 이념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온소몽돌해변에서 '시소설'이라는 글제로 3행시 발표를 하였는데 이광세 씨와 내가 선정이 되었지만 중복을 피하는 바람에 선물은 못 받았으나 기분은 아주 좋았다. 시:시에 그려진 백석의 자연은 소:소설보다 진솔한 사연을 담아 설:설(舌)로써 다 할 수 없는 걸작이 되다 날씨도 포근하고 화창한 봄 날,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산들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2018년 KTX를 타고 달린 인문학 여행은 참으로 값지고 즐거운 여행이었고 다만 한 해 두 번 밖에는 기회를 안 준다고 하여 아쉽기는 하지만 행복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국립중앙도서관과 깊고 자상한 설명을 해주신 방민호 교수님 그리고 진행요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사진 올리기가 안 되어 아쉽습니다.

    최상민 2018.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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