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날마다, 브랜드
날마다, 브랜드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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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브랜드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지

도 어느덧 십수 년이 훌쩍 지난 것 같다. 마케팅과 가격경쟁력

이라는 말이 잠잠해지고 대신 브랜드라는 단어가 범람하고 있

다. 성공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비법이나 법칙을 알려준다는 책

들이 출간되고,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이도 지역의

브랜드 파워를 키우겠다고 이야기한다. 업무 미팅으로 만나는

클라이언트들도 하나같이 이제는 시장에서 브랜드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한다. 어느샌가 우리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온 브랜

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매장으로 올라가는 길에 우연히 신용

카드 상담원을 만났다고 치자. 지금 쓰고 있는 카드를 프로모

션 중인 다른 카드로 바꾸면 첫해에는 연회비도 없고 20만 원

상당의 바우처도 함께 제공해준다고 한다. 그럼 바꿀까, 바꾸지

않을까? 평소 즐겨 가는 동네 슈퍼마켓이 있는데 집 앞에 다른

대형 할인점이 생겼다. 개업 기념으로 회원 가입하는 고객에게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5만 포인트를 준다고 한다. 바꿀까, 바

꾸지 않을까? 모르겠다. 상담원들의 현란한 말솜씨를 당해 낼

자신이 없다.

그러나 만약 지금 쓰고 있는 아이폰을 다른 스마트폰으로

바꾸면 지원금도 제공해주고, 남아있는 기기 할부금과 약정 위

약금까지 전부 내준다면 어떻게 할까? 단언컨대 나는 바꾸지

않는다. 나를 비롯해서 아이폰을 쓰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쉽

게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에 즐겨 쓰던 것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좋은 브랜드가 아닐 것이다. 쏟아지

는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들 사이에서 매력적인 혜택의 유혹을

물리치고 기존에 사용하던 것을 계속 유지한다면 비로소 그것

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진정한 브랜드로 존재하게 된다.

애플Apple의 브랜드는 한입 베어 먹은 사과 모양 심벌이 아니다.

늘씬하고 매끄러운 최신형 아이폰iPhone도,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유창한 키노트 프레젠테이션도 아니다. 방대한 콘텐츠를

보유한 앱스토어App Store도 아니고, 깔끔하고 세련된 광고 스타

일도 아니며, 빠르고 편리한 운영체제도 아니다. 애플의 브랜드

는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우리로 하여금 보다 편리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약속과, 제품과 서비스를 비롯한 다양

한 온?오프라인 경험 접점을 통해 그 약속을 일관되게 지켜나

감으로써 우리가 각자 느끼는 애착이나 충성심, 친근함 등의 총

체적인 감정이다. 이때 느끼는 감정으로 인해 어떤 브랜드에 대

한 인식이 형성되는데, 이러한 인식들이 모여 브랜드 이미지를

만든다.

요약하면 고객 입장에서 브랜드는 해당 브랜드의 실체와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정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

로 좋은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브랜드의 실체, 즉 제

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실제적인 편익

을 갖추는 것을 우선해야 하며, 다양한 고객 커뮤니케이션 활동

을 통해 실체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축적해야 한다.

한국의 기업은 유럽이나 미국의 기업보다 유독 브랜드 리뉴얼

을 빈번하게 한다. 한국의 대다수 기업이 브랜드를 단지 이미지

로만 여기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전보다 매출

이 감소하면 기업 안에서는 으레 브랜드 리뉴얼 이슈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럴싸하게 이미지 변신을 꾀하여 제값보다 높은 마

진을 붙여 비싸게 판매한 뒤 단기간에 매출을 올리기 위한 수단

으로 브랜드를 활용하려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이미지는 공허하다. 설령 원하는 브랜드 이미

지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잠깐의 허상이 주는 달콤함은 그리 오

래가지 않는다. “이미지 쇄신을 통해 브랜드 경쟁력을 강화하

자”라는 기업 임원의 외침이 나에게는 “포장에 신경 써서 더 많

이 팔아보자”라고 들리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올바른 브랜드

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견고한 정신에

기반을 두고 고객과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고

민해야 한다.

나는 브랜드 컨설팅 회사를 시작으로 브랜드 업계에 발을 들이

고, 기업의 브랜드 마케팅 부서를 거쳐 현재 브랜드 경험 디자

인 회사에서 브랜딩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브랜드 고유의

정신에서 사용자 경험까지 세심하게 고민하고 만드는 과정은

언제나 나에게 큰 인상을 준다. 동료 디자이너들의 포트폴리오

가 쌓이는 것을 보면서 나도 포트폴리오가 하나 정도 있으면 좋

겠다고 생각했다.

기획자의 포트폴리오는 생각이다.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

이며, 축적된 경험이 주는 지혜이다. 이 책은 그동안 다양한 분

야의 브랜드를 대하며 마케팅에서 브랜드로, 그리고 브랜드에

서 브랜드 경험으로 진화하고 있는 브랜딩이라는 것을 업으로

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과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브랜

드와 관련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기에 강력한 브

랜드를 만드는 방법이나 차별화 전략 같은 지식의 습득을 기대

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 한 브랜드 기획자의 경험과 생각이 담긴 포트폴리오

를 통해 ?좋은 브랜드란 무엇인지’ ?좋은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서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보

고,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브랜드에 대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

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보람될 것이다. 궁극

적으로는 그런 과정이 지속되어 우연히 마주치기만 해도 기분

이 상쾌해지는 좋은 브랜드가 우리 일상에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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