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 BOOK TOOLS: 도구는 책을 만든다
BOOK TOOLS: 도구는 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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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정성, 발품으로 얻은 투박한 도구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을 것이다. 도비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호출로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충무로 깊숙한 골목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도착한 곳에는 왜정시대의 목조건물이 멋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건물로 들어서니 인부들이 기계를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니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제책 작업 현장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40년 동안 장부와 수첩을 만들던 주인은 칠순이 넘어 이제는 일을 할 수 없다 했다. 사용하던 기계는 이미 모두 처분한 뒤였고, 바닥에는 쓰레기만 가득했다. 주인에게 여기 있는 물건을 가져가도 되는지 넌지시 물으니 “쓸 만한 것 없으니 괜히 힘 빼지 마시게.” 하고 자리를 떴다. 현대판 금맥 찾기가 시작되었다. 작업복은커녕 마스크도, 장갑도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맨손에 검정을 묻히고, 먼지를 먹어가며 쓰레기를 헤집었다. 지금 내게 있는 보물 가운데 보물이 바로 그때 그곳에서 찾은 물건들이다.



도구의 매력에 빠진 것은 여러 잡지를 만들면서부터였다. 그래서인지 특히 책 만드는 도구에 관심이 많았다. 책을 만들 때는 사람이나 기계는 물론이고, 크기는 작아도 없으면 안 될 도구도 필요하다. 숫하게 유럽을 오가며 많은 도구를 봤지만, 그저 멋지다는 느낌 외에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비로소 ‘내 것’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은 우리 선배들이 사용한 손때 묻은 도구들을 본 뒤였다.



명품이거나 유명한 장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한 책 만드는 도구일 뿐이다. 어디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쓰기 편하게 고치거나 마구잡이로 만든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들의 소중함과 귀함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워하지만 말고 내가 나서서 도구들에 다시 생명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책 만드는 도구를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잃어버리거나 망가져도 크게 상관없는 도구들을 하나하나 모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책은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마흔 종류, 500여 가지가 넘는 도구를 사진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누군가는 이런 것이 왜 소중한지 내게 물을지 모르겠다. 외국 것에 비해 튼튼하지도 않고, 디자인도 매끄럽지 못하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도구들이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 도구들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책을 만들 때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 것은 돈을 들이면 대부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것은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없다. 발품을 팔아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운도 따라주어야 한다. 그렇게 도구들을 찾아 헤매는 17년 동안의 여정이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도구들이 내게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소중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세상에 도구들을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래된 도구에 대한 사람들이 관심이 점점 많아지면서, 오랫동안 세상에 알리지 못한 이야기를 이제야 조금 풀어놓을 수 있게 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도구가 버려지고 있을 것이다. 하나만 따로 놓고 보면 사소하겠지만, 도구들이 모였을 때 내뿜는 물성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이 책을 통해 독자 여러분이 세월의 흔적이 묻은 도구의 가치에 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단 한 명이라도 이 책으로 누군가 나처럼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간다면, 이 책의 소명을 다한 것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내게는 또 하나의 꿈이 있다. 책이 완성되는 전 과정을 한곳에서 배울 수 있는 책예술학교가 그것이다.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이 필요하다.



이 책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문지숙 주간과는 17년 전 『책 잘 만드는 책』을 쓰며 인연을 맺었다. 그 뒤 이 책을 통해 지은이와 기획자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를 비롯해 도구 사진을 찍어준 사진가 신규철 님, 멋진 책을 위해 힘써준 편집자 민구홍 님과 디자이너 이소라 님, 마지막으로 안그라픽스 대표 김옥철 님께 감사드린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니 현희자 님께 이 책을 바친다. 아울러 영원히 함께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께 영광의 감사를 드린다.



2015년 12월

삼례 책공방북아트센터에서

김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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