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후기그 날의 낭만과 감동을 함께 나누어요.

  • 16년도 마지막 인문열차여행~~

    16년도 마지막 인문열차여행~~

    인문열차 삶을 달리다~~ 뭔지 몰랐는데 언니의 도움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춘천에서 깜깜한 새벽에 첫 itx열차를 타고 출발10분전에 용산역에 도착해서 갈 수 있었습니다. 전라도지역은 가기가 쉽지않아 솔직히는 저렴한 비용에 가는거라 기대를 전혀 안하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완전 반전~~ 계속 우와~~우와~~이런 말 밖에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이유는 ㅋㅋ 맛있는 밥에 깔끔한 숙소, 역사에 무지한 나에게 귀에 쏙쏙 들어오게끔 설명해주시는 주영하교수님!!!   엄마를 모시고 간거라 우리는 많이 걷거나 하면 입구에서 경치나 보고있자하는 마음으로 갔었는데 행사진행자분께서 항상 뒤에서 와주시고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여행에 참석하신 분들도 너무 좋았구요. 1박2일동안 함께 움직이고 해서 그런지 헤어질 때는 너무나도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인문열차!!!! 다녀온 후 주변사람들에게도 너무 좋았다고 자랑하고 다녔습니다..ㅎㅎ 내년에도 기회가 된다면 꼭 가고싶습니다!!! 아차 그리고 다음에는 참석하기전엔 책도 많이 읽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몇장 올립니다...   다산초당에 올라 주영하교수님의 설명듣고 있는 모습^^  조선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거처하면서 창작과 저술활동을 하던 운림산방에서^^

    이선미 2016.11.16

  • 남도의 차향따라 천리길을 다녀와서

    남도의 차향따라 천리길을 다녀와서

           <남도의 차향 따라 천리 길을 다녀와서>                                <여는 글> 운좋게 선정되어 올해의 마지막 <인문열차>을 탈 수 있는 기쁨에 삽상한 늦가을 바람을 맞으며 서둘러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 가을 끝자락의 산하와 데이트 하려는 울긋불긋하게 치장한 행락객들로 역안은 많이 붐비었다.   전국의 역사적 숨결이 있는 곳 이라면 어디라도 찾아 가서 보고, 듣고, 깨달으면서 삶의 여유와 역사적 혜안을 얻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인문열차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속에 벌써 6년 이란 세월속에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중적인 인문학을 알게 해준 고마운 프로그램이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열차에 올라 첫 번째 탐방장소를 가기위해 거쳐 갈 홍길동의 고향인 장성역으로 향했다.   불과 몇 달전에 초록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들판은 온데 간데 없고 추수 끝난 황량한 들판은 동그랗게 비닐에 싸서 묶어둔 볏집만 나뒹굴고 있어 아무리 인간이 지식과 문명이 발달해도 자연의 섭리와 질서 앞에서는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언제 보아도 아기자기 하고 오밀조밀한 우리 조국산천은 에미의 젖가슴처럼 포근하고 예쁘다. 길가의 풀들은 윤기를 잃어 다음시간을 준비하고 단풍으로 몸단장한 나무들은 마지막 소임을 다하려는 듯 우리의 눈을 즐겁게 했다. 차장으로 스치는 늦가을의 정취에 취해서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장성역에 도착해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버스에 올라 첫 번째 탐방지인 다산 초당으로 향했다.   <우리 민족의 최대의 백과사전적 지식인이자 실천하는 큰 스승께서   18년 유배생활중 10년을 지냈던 다산초당> 버스에서 내려 다산초당으로 올라 가는 길은 고즈녘하고 아름다운 오솔길이었지만 돌길에다 나무뿌리들이 땅 밖으로 올라와서 울퉁불퉁 한데다 경사진 오르막길을 걸으려니 다소 힘들었다. 하지만 다산선생이 걸었던 길을 걷는다 생각하니 불편함은 오히려 그 분의 유배생활을 겪으면서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나라와 민족과 인간해방을 위하여 굳건한 삶을 사셨던 그의 파란만장한 집념과 감동적인 삶에 위로를 받으며 솔향과 차향속에서 정진하신 모습을 그려보며 걸으니 한결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의 18년 유배기간 중 마지막 10여년 동안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500여권의 책을 저술한 곳이다. 원래 목조 초가였으나 1936년에 노후로 인해 붕괴 되어 없어졌던 것을 1957년 강진 다산 유적보존회에서 목조 와가로 중건한 것이다. 처마 밑에는 원판이 없어져 완당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다산 선생이 기거 하였던 동암, 제자들이 지냈던 서암을 비롯하여 다산사경이 있는데 ‘정석’은 다산이 석벽에 친히 글씨를 새긴 것이고 ‘다조’는 뒷담 밑 약천의 석간수를 손수 떠다가 앞뜰에서 솔방을을 지펴 차를 달이던 청석이며 직접 돌을 나르고 만들었다는 ‘연지 석가산’이 남아 있었다. 연지는 초당 동쪽 앞에 수양을 늘어뜨린 아담한 못으로 그 안에 몇 개의 괴석을 쌓아 석가산을 쌓았다. 약천은 지금도 물이 졸졸 흐르고 있어 인걸은 간데 없고 산천은 의구하다는 말이 실감났다.   다산 선생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실학을 집성한 유적지인 이 곳은 다산이 백련사에 들렀다가 해남 대흥사의 혜장선사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도움으로 1805년 강진읍 뒷산에 있는 보은산방으로 거쳐을 옮겨 그곳에서 9개월 동안 머물면서 혜장선사와 교우를 통해 다산은 다도의 경지를 익히게 되었고 이 후 유배생활을 감내하는데 차는 그의 동반자가 되었다.   <다산의 외로운 귀양살이를 잠시나마 잊게 해준 귀한 벗을 만난   백련사>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숲길은 다산 선생이 초의선사. 혜장 선사 추사등 조선시대 최고의 철학자들이 차와 시국담을 나누며 거닐었던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전 왼편으로 나있는 800여 미터의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헤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고 한다. 벗될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곳 다산초당과 백련사간 숲길은 2009년 ‘제 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숲길]부문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장려상)을 수상한 곳이라고 한다. 이 길은 지금도 사색과 명상의 다산 오솔길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남으로는 강진만의 해안선이 펼쳐져 있고 북으로는 만덕산 깃대봉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백련사는 만덕산에 위치해 만덕사라고도 불렸다. 백련사는 839년 무염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시대에 8국사를 배출하고 신앙결사운동이자 불교정화운동인 ‘백련결사’ 의 본거지인 곳이다. 다산선생은 백련사의 주지였던 아암 혜장선사와 첫 만남 때 이곳 백련사에서 ‘주역’을 놓고 밤새 대화를 나눴고 이때 혜장선사는 큰 깨달음을 느꼈다고 한다. 적거했던 다산은 백련사에 자주 들러 차를 마시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한다.   만남 6년 뒤 혜장선사는 먼저 세상을 떠나는데 다산선생에게 혜장은 외로운 귀양살이를 잠시나마 잊게 해준 귀한 벗이었다고 한다. 백련사 동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151호로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그 중간중간에 보이는 아득하고 아득한 바다풍경은 숨 막힐듯 아름다웠다.   우두봉 아래 작은 선방에는 대나무만 쓸쓸하게 낮은 담 위로 솟았구나 해풍에 밀리는 조수는 산밑 절벽에 부딪치고 읍내의 연기는 겹겹 산줄기에 깔려있네 둥그런 나물 바구니 죽 끓이는 중 곁에 있고 불품없는 책상자는 나그네의 여장이라 어느 곳 청상인들 살면 못 살리 한림원 벼슬하던 꿈 이제는 아득해라   다산선생이 지은 이 시는 낯선 땅으로 유배되어 외롭고 괴로운 선생의 당시의 선생의 심중을 그대로 표현한 시같다. 우리 일행은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모두 한목소리로 시를 낭송했다. 시는 지금 들어도 애잔하고 가슴시리게 다가왔다.   지금은 간척이 되어 절벽 밑 까지 들어왔던 구강포 앞바다는 저 멀리서 은빛 햇살로 출렁거리며 남녘의 풍광을 아름답게 느끼게 해주었다. 천년고찰 만덕산 백련사에서 옛길을 걸으며 흩어진 생각을 가다듬고 무엇보다는 제일 소중한 나 자신을 사랑하며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서 잔잔한 행복감에 젖어 발걸음을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우리 민족의 큰스승이며 실학을 집대성 시킨 다산선생의  다산기념관> 전남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에 위치한 다산기념관은 다산 선생의 성장 관직생활, 유배생활, 해배이후의 저술 활동등 다산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특히 동화로 만나는 다산의 일생은 어린 아이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꾸며져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좋은 학습의 장이 되어서 어린새싹들이 이 나라를 가꾸어 나갈 때는 살기좋은 나라가 되기를 꿈꾸어 본다.   주요전시물로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인 목민심서는 1표2서중 가장 공들여 저술했으며 해배되는 해인 1818년 본문을 완성하고 1821년 서문을 완성하였다. 이 책을 많은 공직자들이 귀감으로 삼고 읽고 행한다면 우리나라는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가 되어 부패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을 것이다. 다산선생은 관직을 맡기면 절대 안되는 사람으로 ‘자신의 능력과 맞지 않는 관직을 바라는사람, 좋아서 자랑하는 사람‘을 가르켰다.   특히 백성을 대하는 목민관은 능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는데 선물과 뇌물의 기준도 ‘선물로 보내온 물건은 비록 작은것이라 하더라도 온정이 맺어 졌으니 이미 사사로운 정이 행해진 것이다‘라 하여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뇌물이며 이를 받는 것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다산선생이 현신하여 이 나라의 난국을 해결하고 다시 올바른 국정을 펼쳐서 가뜩이나 살기 힘든 평범한 서민들의 울분과 고통이 없는 살기 좋은 나라를 꿈꾸어 본다. 마과회통은 홍역치료에 관한 의학서적으로 당시까지 홍역에 관한 국내외 책들의 오류를 비판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하였다.   많고 훌륭한 전시물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하피첩과 매화병제도에는 남편, 아버지로서 가족에 대한 사랑등 다산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더 애정이 갔다. 재화를 비밀리에 숨겨두는 방법으로 남에게 베풀어 주는것 보다 더 좋은것이 없다라고 자식들에게 부탁하신 다산선생이 더욱 존경스럽다. 백과서전적 지식인이었던 다산은 무엇보다는 앎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행하고 실천하여 죄수를 불쌍히 여기고 부모의 마음으로 의술을 배풀고 백성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특히 곡산부사시절 이계심 사건을 백성의 입장에서 민원을 처리하여 봉공의 정신을 실천한 다산은 우리 민족의 대스승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감동과 존경의 마음을 품고 기념관을 나서니 늦가을 오후의 아름다운 정취가 흘러 나오는 음악과 함께 노곤한 몸을 가볍게 해주었다. 버스에 올라 석천한정식 식당으로 향했다. 맛깔스럽게 차려진 남도밥상이 우리를 맞이했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해남 땅끝 호텔로 가서 강사님의 글로벌 차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듣고 구름과 숨박꼭질하는 보름달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인 해남 땅끝 호텔 사랑채로 향했다.   우리는 방식구와 호구조사로 이야기 꽃을 피우다 달보드레한 꿈나라로 갔다. 간밤에 다른 투숙객들의 여흥으로 잠을 설쳤지만 창문을 여니 탁트인 바다가 상쾌하게 다가왔다. 호텔조식을 먹고 두 번째날 첫 번째 탐방지인 대흥사로 향했다.   <두륜산 도립공원안에 대흥사와 한국차의 성지인 일지암을 찾아서> 두륜산 초입부터 오색찬연하게 물든 예쁜 단풍들이 바람결에 속살거리며 우리의 함성을 자아냈다. 단풍나무들이 마지막 늦가을 정취를 맛보려는 행락객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가히 우리 눈을 사로잡았다. 절 입구에서 산정상을 쳐다보니 두륜산 대흥사 청정법신 비로자나 와불상이 누워있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대훙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으로 해남 두륜산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람의 규모가 크고 가람배치는 절터의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을 중심으로 별원의 성격을 지닌 남원과 북원으로 되어 있다. 북원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원은 천불전과 서산대사의 유물이 있는 표충사일곽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가 중건한 대광명전 일곽으로 나뉜다. 온천지가 예쁜 수채화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아름다운 두륜산을 오르며 우리는 이번 주제가 ‘차의 길’인 관계로 우리나라의 다도문화를 정립해 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1826년부터 40년동안 머문 대표적인 茶문화 유적인 일지암으로 향했다.   차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주로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과 영남지방에서 차나무가 자라는데 풍토가 알맞았으므로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어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가 밀려나면서 다도도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 이어지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 폄으로써 전래의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선>은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며 東茶(동다)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는 책이다.   24세 연상이어서 스승으로 모셨던 정약용과 동갑으로 승속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누구보다도 친밀한 정을 나누었던 김정희와의 사귐에서도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했음은 물론이다.   초의선사 당시의 집은 세월의 풍파로 다 무너졌는데 1980년에 한국차인연협회에서 옛주춧돌 뒤에 새로 띠집을 지어 놓았다. 앞쪽 둔덕에는 차나무가 푸르고 일지암 뒤편 돌 틈에서 솟는 샘물은 대나무로 연결된 돌확을 거쳐 흘러서 크고 작은 두 연못을 차례로 채운다.   샘 근처에는 찻잎을 다루는 맷돌이 놓여 있고 일지암 마루 뒤편에는 찻물 끓이는 부뚝막이 있다. 일지암과 연못사이의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면석이 끼여 있고 그 앞 넓적한 돌이 놓였는데 초의선사가 앉아 다선삼매에 들던 돌평상으로 보기도 한다. 소치 허련은 일지암에 있을 때 초의선사의 모습을 그린 말중에 ‘눈내리는 새벽이나 달이 뜬 밤마다 시를 읊으며 흥을 견디곤 했다. 향기가 일어나고 차가 한창 끓으면 흥이 내키는 대로 걷는다‘라는 글귀를 생각하며 초의선사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차향기에 취해보고 싶었다.   초의선사는 중년이후에 큰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일지암을 짓고 40여년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에 전념하다가 81세로 입적했다. 우리을 황홀하게 했던 아름다운 두륜산의 가을잔치를 뒤로하고 우리는 되돌아서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이 있는 해남 윤씨고택으로 향했다.   <해남윤씨 사람들의 삶과 문화예술이 녹아 있는 녹우당과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을 찾아서> 강사님께서 이 고택을 찾은 이유는 다산선생의 어머니가 해남 윤씨 윤두서의 손녀였고 다산이 유배시절 이곳 외가인 해남윤씨 종가의 많은 도움을 받아서 이번 주제와 연관을 지어 탐방한다고 말씀하셨다. 다산 선생이 훌륭한 위인으로 된 데에는 외가의 DNA를 받아서 그럴거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우리는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전시관은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등 해남윤씨 녹우당가 사람들의 역사 유물이 전시되어 그들의 삶과 문화 예술을 한눈에 느끼고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올곧은 정치가의 삶을 살았으며 국문학의 비조라 일컫는 고산 윤선도를 비롯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여 뛰어난 예술적 감각으로 많은 그림과 글씨를 남긴 공재 윤두서등 녹우당 해남윤씨가에서 남긴 4천6백여점의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보물급 고문서와 서책들 고산의 삶과 학문, 작품세계를 느낄 수 있는 문화재들 조선후기의 실학적 학문을 추구하며 풍속화를 비롯 선구자적 화풍을 추구하였던 공재 윤두서의 생애,문학, 그림세계를 알 수 있는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국보 제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퍽 인상적 이었다. 정면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까지 표현한 공재의 자화상은 화면가득 얼굴을 채우고 머리부분은 과감히 생략해 버린다. 너무도 사실적인 자화상은 보는 순간 머리에 각인돼 버리는 마력을 갖는데 이는 파격적인 구도 때문이다. 내면의 세계까지 생생히 표현한 그의 자화상은 그가 그만큼 자아가 컸음을 의미한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공재가 자신을 너무도 사랑했던 인물, 자존감이 대단했던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또 우리나라 최초로 백성들의 삶을 화폭에 담아낸다. 우리나라 풍속화의 시원을 연 공재의 화풍은 그의 아들인 낙서 윤덕회와 손자인 청고 윤용에게로 이어진다. 공재는 다산의 외증조부로 그의 이러한 학문적 세계관은 다산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 받는 시조.시인으로서 실사구시적인 학풍을 추구했던 만큼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노래하고 철따라 바뀌어가는 자연의 모습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등은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선비의 생활과 서정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 시조의 최고봉이자 산수미학의 절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 최고의 원림문화를 남긴 고산은 순수자연을 그대로 둔채 거기에 최소한의 인위만을 가미해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창출한 점에서 동양적인 자연관을 보여주며 그의 높은 미적 안목을 느끼게 한다. 훌륭하고 소중한 역사의 향기를 뒤로 하고 전시관 뒤쪽으로 난 예쁘고 정갈하게 손질된 길을 걸어 녹우당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해남 녹우당에 터를 잡고 조선시대 이후로 600년을 이어온 남도의 종가 해남윤씨가는 한터에서 이처럼 600년 이상 가문을 유지해온 점은 세계에 자랑할 전통이다. 시조 윤존부는 고려 문종 때의 인물이고 그 후손인 녹우당 가문은 12대 윤효정에 이르러 강진을 떠나 해남 백련동에 정착하면서 그 자손들이 터를 잡고 뿌리를 내려 가문 부흥의 기초를 다진 이후 지금에 이른다고 했다.   윤효정 이후로 백성에 사랑을 강조한 윤씨가는 세 가지 일화를 통해서 어초은 가문의 백성사랑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해 옥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을 들은 윤효정은 관아에 찾아가 백성들의 세금을 대신 내어주고 풀어주는 일을 세 번이나 했다. 이 일로 인하여 해남 윤씨가는 ‘삼개옥문적선지가’ 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백성을 사랑한 종가였고 근검과 적선의 삶을 실천했기에 긴 세월을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종가로 이어져 왔을 거란 생각이 든다.   왕의 사랑이 담겨 있는 녹우당은 해남 연동마을의 해남 윤씨 종택을 일컫는데 녹우는 녹음이 우거진 때 비가 내린다는 뜻과 동시에 선비의 변치 않는 절개와 기상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전라남도에 있는 민가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으로 효종 임금이 사부였던 고산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와 사랑채로 만들고 녹우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해남 윤씨의 종가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녹우당 뒷산인 덕음산 중턱에 500여년 된 400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있는데 이 숲은 어초은이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에 따라 후손들이 식재했다고 한다. 이 숲은 문화적 생태학적인 보존가치가 높아 1972년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녹우당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행랑채와 마당을 지나 그 옆면 배치 된 사랑채,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연못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녹우당이 보수공사를 한다고 천으로 가려져서 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녹우당앞에 윤효정 아들의 과거합격을 기념하여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파란하늘과 대비 되어 샛노랗게 물들어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500년 된 은행나무만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 고택의 500년의 역사을 간직하고 있을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진도의 운림산방과 진도역사관을 찾아서> 버스로 많은 국민들의 가슴 아픈 추억으로 남겨진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진도로 향했다. 아직도 그날의 사고났던 모습들이 생생하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피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많은 학생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몄다. 우리는 진도2대교를 지나서 바로 간장게장 정식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운림산방으로 가기전 바로 앞에 있는 이 충무공 승전공원으로 잠시 산책을 했다. 이곳 울돌목 앞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이 1597년 정유년 9월 16일에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133척과 맞서 진도군민과 함께 필생즉사, 필사즉생의 각오로 싸워 하늘마저 감동시킨 명량대첩을 이룬 곳이다. 이런 난국을 맞은 우리나라가 성웅 이순신같은 국가의 지도자가 나오기를 소원해 본다. 명량대첩에서 고귀한 생명을 바쳐 순국한 영웅들께 감사하며 운림산방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진도아리랑가락이 울려나왔다. 언제나 들어도 구성지고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곡조가 심금을 울린다. 진도 운림산방은 넓고 울창한 진도 쌍계사 상록수림과 조선시대 봉수터가 남아 있는 첨찰산을 배경으로 자연유산과 역사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역사적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뛰어난 곳이다.   첨찰산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 모습을 보고 운림산방이라 이름 지어진 이곳은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1982년 소치의 손자인 남농 허건이 복원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일가 직계 5대의 화맥이 200여년 동안 5대에 걸쳐 8인의 화가를 배출한 운림산방은 조선조 후기 남종화의 거봉이었던 소치선생의 화실의 당호로 소허암 도는 운림산방 이라고도 부른다. 양천 허씨 12대손으로 진도읍 쌍정리에서 출생한 선생의 이름은 허유이고 (후에 허련으로 개명) 자는 마힐이다. ‘소치’라는아호는 스승인 추사선생께서 내려주셨다.   소치선생은 시와 문을 동다송의 저자 초의선사로부터 익히고 세한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로부터 서와 화를 전수 받았다. 추사선생은 소치의 시.서.화를 평하여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극찬하였다. 1849년에는 헌종대왕과 독대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당대의 명사이던 석파 이하응 민영익, 신관호등과 교유하여 그 명망이 놓았다. 1857년 귀향하여 이곳에 운림산방을 세우고 소치선생의 나이 85세때인 1893년 생을 마감할때까지 소치 특유의 문기가 드높은 불후의 작품들을 남겼다. 보배의 섬 진도에 있는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의 화혼이 그 후손들을 통해 지금도 찬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지구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살아 있는 미술관”이다. 영화 “스캔들”을 촬영했던 연지와 소치선생이 심었다는 백일홍나무 앞에서 아름다운 첨찰산 봉우리 아래 춘,하,추,동으로 펼쳐질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보며 진도역사관으로 갔다.   진도지역 고유의 역사유물을 영구히 보존함으로써 후세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된 진도역사관은 삼별초실, 유배문화실,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서문화와 유배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민속유산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계승.발전 시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진도씻김굿, 진도다시래기, 진도북놀이 진도만가, 남도잡가, 진도소포걸군농악, 진도닻배노래, 진도홍주등 진정 남도의 예향이 넘치는 아름다고 보배로운 섬 진도에 와서 보고 듣고 느낄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마지막 일정을 마치니 비가 내렸다. 하늘도 우리 일정을 도운것 같아 노곤하고 힘들었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인문열차를 타러 목포로 향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작은 백일장 4행시 짓기에 뽑혀 강사님이 쓰신 책을 선물로 받아 기분이 좋았다.   운: 운좋게 선정되어 남도라 천리길을 오롯이 달려와서 림: 님들의 얼과 정신 솔향과 차향에 담아서 산: 산처럼 큰 시름단지 울돌목에 버렸지만 방: 방방곡곡 울리는 국민들의 함성소리 들으며 이나라 근심 걱정은 어이할꼬                               <맺 음 말> 이번 인문열차 타이틀은 “그림 속의 음식 이야기”였지만 음식중에서도 남도의 차향을 찾아 선인들의 삶속에서의 차이야기를 따라 남도라 천리 길을 오롯이 달려와서 늦가을의 아름다운 산하와 함께 그분들의 삶과 사상과 생활을 통해 이 시대의 우리가 자신의 삶을 재인식하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특별한 여행을 할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한 여행이었다.   인문학기행은 역사와 문학, 자연과의 만남이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도 하고 내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면서 내적 동력을 키우기도 하고 그분들의 삶을 통해 반성적사고도 할 수 있어 항상 내 중년의 삶의 동력이며 윤활유입니다.   나라안은 잘못된 지도자들로 인해 어수선하고 불안하지만 그럴수록 선인들의 지혜와 혜안으로 이 난국이 잘 수습되기를 바라며 이번 여행에 강사님으로 수고하신 주영하 교수님, 그리고 진행으로 수고하신 쏙쏙체험식구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1박2일 동안 인문열차 길동무로 함께 참여했던 모든 일행분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우리 삶의 질을 높여줄 인문열차가 영원한 문화발전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옥란 201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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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연 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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