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인물탐구  

 

  최근 우리나라에는 ‘작은도서관’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고, 중앙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국립중앙도서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기업 및 언론 등에서도 ‘작은도서관’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에 대해 여러 차원에서 논란이 일어나고 있지만, ‘작은도서관’은 한국 사회에서 공공도서관이 채우지 못하는 정보 소외 지역에서 공동체 문화 및 도서관 문화를 꽃피우는 역할을 하고 있고, 그 뿌리는 60ㆍ70년대의 마을문고 운동, 80ㆍ90년대 도서원 및 사립문고 운동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민간 차원에서 전개되어온 이러한 도서관운동은 한국인이 얼마나 도서관을 염원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도서관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 스스로 도서관을 만드는 현상을 접하면, 문헌정보학자와 도서관인의 눈으로 볼 때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민간에서 만드는 ‘작은도서관’은 주로 ‘회원제’로 운영되면서 지역 주민의 현재적ㆍ잠재적 정보 요구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지역 주민을 위한, 지역 주민에 의한, 지역 주민의 도서관’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며, 갖가지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도서관’을 꿈꾸고 염원하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꾸미고 있는 것이다.

  국내 민간 도서관운동의 정신이 주민 및 노동자의 ‘회원제’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미국 공공도서관의 설립 기반도 ‘회원제 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회원 도서관 제도를 구상하고 실현한 인물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이다.   

 

독서를 통해 자기교육을 실현한 의지의 소년


Jean-Baptiste Greuze이
그린 초상화
사진출처 :
http://en.wikipedia.org/
wiki/Benjamin_Franklin

  벤자민 프랭클린은 흔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또한 그는 외교관, 저술가, 과학자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미국 독립의 기초를 닦은 인물인 그는 자유, 평등, 민주주의, 실용정신을 주창한 사상가이자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팔방미인이었다. 특히, 그가 미국 공공도서관의 터전을 닦은 인물이라는 점에 우리 도서관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랭클린은 1706년 1월 17일 미국 보스톤에서 17남매 중 15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시아 프랭클린(Josiah Franklin)은 양초와 비누를 만드는 가내공업자였다. 당시 식민지 초기 사회에서는 가내공업을 하여도 살림이 어려워서 아이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다행히 형제 중 유일하게 학교를 다녔으나, 그마저도 학교를 오래 다닐 수 없었다. 그는 보스톤 라틴 스쿨에 다녔는데 졸업하지 못했다. 그 뒤 그는 책을 찾고 탐독을 하면서 자신의 교육을 이어나갔다. 한때 그는 산술학교(算術學校)에 다니기도 하였으나 10세가 되는 해에 아버지의 가업을 돕기 위해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훗날 미국인을 비롯한 세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박식한 프랭클린이 정규 교육을 2년도 못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진정 ‘책의 힘’이며, 독서를 통하여 자기교육을 이어 나간 가난한 소년의 불굴의 의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2세 때 그는 그의 형 제임스(James)의 인쇄업을 돕는 견습공이 되었다. 그가 15세가 되었을 때, 제임스는 New England Courant라는 신문을 발행했는데, 이것은 식민지 미국 최초의 독립적인 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 신문에 Mrs. Silence Dogood이라는 가명(필명)으로 편지 글을 투고하였는데, 그의 글이 유명해지고 뒤늦게 그가 필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형과 다투게 되자, 그는 인쇄소를 떠나 도망을 간다. 17세에 필라델피아로 가서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그곳에서 인쇄공으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필라델피아에서 신문을 발행하는 일을 후원하겠다는 주지사 Sir William Keith의 약속을 믿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그는 런던에서 식자공으로 일했다. 1726년에 그는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와서 상인 Thomas Denham을 도와 사무원, 점원, 책방지기 등의 일을 하였다.1)      

  1727년에 그는 21세의 나이로 Junto(結社)라는 독서클럽을 만들었다. 이것은 시사적인 문제를 토론하는 독서클럽이었는데, 프랭클린의 Junto는 이후 필라델피아에서 많은 독서클럽을 탄생시킨 모태가 되었다. 그는 인쇄공, 목공, 소매상, 사법서사, 측량사, 수학자 등을 규합하여 사회에 기여하고 동시에 개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모하는 토론모임을 이끌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1980년대의 노동자들의 노동도서원과 지역 주민의 교양도서원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필라델피아에서 ‘회원 도서관’을 시작하다

  이러한 독서클럽에서는 회원들이 순번을 정하여 윤리, 정치, 자연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하나씩 주제를 제시한 다음 토론하는 것을 의무화하였다. 또 3개월마다 한 번씩 어떤 주제이든 각자 논문을 써서 제출하고 이를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랭클린은 회원들에게 이러한 제안을 하였다. 즉, 각 주제에 대한 각자의 논문 중에는 각자의 장서에서 인용하는 것이 많으므로, 모임 장소에 회원 각자의 책을 전부 가지고 오도록 하여 모두를 위한 도서관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대로 운영하니 많은 회원들에게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으나, 도서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약 1년 후에는 해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을 통해 도서관이 사람들에게 매우 유익하다는 것이 주지되어, 프랭클린은 본격적으로 정관을 만들고 50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회원 도서관(Subscription Library)’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 제도를 위해 도서관 운영을 보완했다. 장서의 관리를 Junto 회원들이 맡기로 하고, 회원들은 각자 최초 40실링, 이후 50년간 매년 10실링을 내는 규칙을 제정하였다. 프랭클린의 회원 도서관은 1731년에 처음으로 한 회원의 집에 설치되었는데, 1740년 식민지 의회의 후의에 의해 펜실베니아주 의사당의 한 곳을 제공받아 이관되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필라델피아 도서관회사(Library Company of Philadelphia)’이다. 이 건물은 나중에 독립기념관으로 더욱 잘 알려진 건물이다. 프랭클린의 회원 도서관은 주로 회원만 이용하였으나, 그 중 일부는 일주일에 두세 시간 정도 일반 시민에게도 개방하였다. 그리하여 시민들이 ‘시 도서관’으로 부르게 되고, 점차 공공도서관으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곳의 장서에는 역사, 문학, 과학, 철학 분야의 책들이 많았고, 신학서는 비교적 적었다.2) 그 장서에는 새로운 나라의 개척 정신, 인간 중심 사상, 실용 지식 등이 많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인류 평등과 인간 존중 정신을 실천한 사상가

  다시 시계바늘을 약간 앞으로 돌려 1730년으로 가 보자. 이 해는 그가 ‘회원 도서관’을 만들기 1년 전이다. 프랭클린은 예전부터 사랑했던 여인 데보라 리드(Deborah Read)와 결혼하였다. 사실 그녀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으나, 그녀의 전 남편은 빚을 지고 도망을 가 버렸다. 데보라는 부지런하고 소박한 사람으로 프랭클린에게 일생 동안 원군이 되었다. 당시 프랭클린은 자신의 인쇄소를 설립하고 The Pennsylvania Gazette라는 신문까지 발행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정규적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가출하여 인쇄공으로서 갖가지 수모를 겪으면서 오로지 책으로 독학하며 스스로 성장한 프랭클린은 인생의 간난신고를 거쳐 필력(筆力)을 다지고 점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인쇄소와 신문의 경영자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1733년에 그는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Poor Richard’s Almanac)』이라는 책을 Richard Saunders라는 필명으로 발행하였으며, 재치와 경구가 가득 찬 이 책은 널리 애독되었다.         

  30세가 되는 1736년에 그는 펜실베니아 의회의 서기가 되어 정치에도 입문하였다. 같은 해에 Union Fire Company라는 미국 최초의 자원봉사 방식의 소방회사도 설립하였다. 또한 1737년부터 1753년까지 필라델피아 우체국장으로 일했다. 신문업도 성공을 하고 정치적 영향력도 점차 가지게 된 그는 교육을 위한 후원자 역할을 자청하였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그의 진취적인 교육관은 점차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 뒤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의 전신이었던 필라델피아 아카데미의 창설, 도서관의 설립, ‘미국철학회’의 창립 등 폭넓은 교육ㆍ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가져 난로, 피뢰침 등을 발명하고, 전기유기체설을 제창하였다. 이러한 학문과 교육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753년에는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으로부터 명예학위를 받았다.

  1754년에는 올버니회의에 펜실베니아 대표로 참석하여, 최초의 식민지 연합안을 제안하였고, 1757년에는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 미국의 자주 과세권을 획득하였다. 1764년에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의 철폐를 성공시켰고, 1775년 펜실베니아 대표로 뽑혔으며, 17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아메리카-프랑스 동맹을 성립시켜 프랑스의 재정 원조를 획득하는 일에도 성공하였다. 1787년에는 제헌회의에 참여하여 여러 주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고, 헌법 제정에 전력하여 제정된 헌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또한 프랭클린은 그의 저술을 통하여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어야 하고, 아프리카인들이 미국 사회에 통합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프랭클린은 말년을 병석에서 지내다가 1790년에 필라델피아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자유를 사랑하였으며, 인류 평등과 인간 존중 정신을 사람들에게 심고자 하였다. 또한 독서로서 자신을 교육하고 근면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다. 실용적 학문과 과학을 존중하였으며, 공리주의에 투철한 인물로서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도서관인을 비롯한 현대인들은 그에게서 불굴의 의지, 독서의 힘, 개척 정신, 도서관 정신 등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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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wikipedia.org/ (cited 2007. 11. 18)
2) 박상균, 『도서관학만 아는 사람은 도서관학도 모른다』(한국디지틀도서관포럼, 2004), 89-93쪽 참조.  

    글 |이용재ㆍ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