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兪吉濬)은 국운이 쇠퇴하는 조선에서 서구의 정수(精髓)를 소개하고 자주독립의 길을 모색한 지식인이다. 문헌정보학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학, 국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조명하고 있고, 평가가 다소 엇갈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유길준은 이 땅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철저히 고민하고 치열하게 살다간 애국지사임이 분명하다.

유길준에게는 여러 가지 별명이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ㆍ미국 유학생, 문법 교재와 정치학 교재를 함께 쓴 학자, 미완의 개화파, 관료이자 정치가, 조선의 선비이자 신사, 애국계몽ㆍ교육운동가 등이다.

유길준 하면 생각나는 책이 《서유견문(西遊見聞)》이다. 흔히 《서유견문》은 서양을 유람하고 근대 문물을 소개하는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의 기행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기행문이라기보다는 유길준이 근대 국가로서 기반이 튼실하지 못한 조국을 위하여 선진적인 서구 문물을 온몸으로 느끼고 각종 문헌을 읽고 그 고갱이를 소개하고자 한 당대 최고 수준의 서양입문서이자 애국계몽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총 20편의 글로 되어 있는데, 서론에 해당하는 제1편(“지구 세계의 개론” 등)과 제2편(“세계의 바다” 등)에서는 세계의 지리를 소개하였다. 이처럼 세계의 지리를 자세히 소개한 것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다고 하겠다. 본론에 해당하는 제3편(“나라의 권리”)부터 제14편(“상인의 대도”)에서는 국권, 국민, 정부, 납세, 교육, 군대, 화폐, 법률, 경찰, 정당, 육아, 학문, 종교, 상업 등 서구의 근대 문물을 망라하고 그 진수를 요약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결론은 제14편의 뒷부분인 “개화의 등급”이다. 제15편부터 제20편까지는 보론으로 혼례, 장례, 의식주, 농업과 목축업, 오락, 병원, 교도소, 박람회, 박물관, 도서관, 신문, 증기기관, 전화기, 서양의 대도시 등을 소개하였다. 기행문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은 그나마 제19편과 제20편의 서양 도시 이야기지만, 이 부분 역시 일인칭 기행문의 관점으로 쓴 것은 아니다.①

사실 유길준을 도서관사상가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필자가 유길준을 《도서관계》에서 다루는 이유는, 그가 뿌린 근대 개화사상(開化思想)이 우리나라 민족도서관운동의 발단이 되었기 때문이며, 필자가 최근에 소개한 도서관사상가 윤익선과 이범승의 애국계몽운동과 민족도서관 건립운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②

그러므로 우리들 사서와 문헌정보학도가 우리나라 근대도서관 사상의 뿌리를 이해하고, 이 땅에 문명개화된 기관으로서 도서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유길준의 개화사상과 그의 대표적 역작인 《서유견문》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유길준은 1856년 10월 24일 서울 북촌 계동(桂洞)에서 양반 가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유치홍은 예천군수, 청송부사 등을 지낸 청백리였고, 아버지 유진수는 승지ㆍ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는데, 모두 학문에 뛰어났다.③

이러한 가문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한학을 익혔다. 병인양요(丙寅洋擾)로 인해 피난을 떠났다가 열네 살 때 서울로 돌아온 그는 역시 학식이 높은 외할아버지 이경식에게서 본격적인 한학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16세 되던 1871년에 개화파의 영수였던 박규수와의 만남을 계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박규수의 지도를 받고 중국에서 유입된 각종 해외 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

이때 서양의 산업발달과 근대 실용학문에 충격을 받은 유길준은 이후 동양 고전에서 서구 근대 문헌으로 공부 길을 돌린다. 나아가 과거제도를 폐지할 것을 국왕 고종에게 건의하고 자신도 출세가 보장된 과거를 포기하였다.

유길준의 개화사상이 본격적으로 심화된 것은 아무래도 일본과 미국 시찰과 유학을 통해서였다. 그는 1881년 1월에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그해 6월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경영하던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서양사정(西洋事情)》 등 각종 개화서적을 탐독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귀국하였다가, 이듬해 보빙사(報聘使)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두 달 동안 외교활동과 시찰을 마친 뒤 귀국하지 않고 11월부터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Salem) 시 피바디 박물관의 관장이던 에드워드 모스(Edward S. Morse) 박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이처럼 그의 멘토는 한학자인 친조부와 외조부에서 일본의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와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진화론자인 모스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유길준은 서구의 지식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으며 조국이 근대적 자주국가로서 토대를 닦는 데 지식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고자 하였다.

유길준의 미국 유학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그는 충격을 받았으며, 이듬해 6월 봄 학기를 마치고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로에 그는 유럽 각지를 살펴보고 이집트,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경유하여 1885년 12월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귀국 직후 유길준은 개화당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 연금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연금 생활은 사실상 그의 식견과 재능을 아낀 고종과 한규설의 보호나 마찬가지였다. 1887년부터 1892년까지 민영익의 별장인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겨져 유폐 생활을 하였다.

《서유견문》은 바로 유페 생활 중이던 1887년 가을부터 1889년 늦봄 사이에 집필한 것이다. 유길준은 자신이 유학 기간 동안 수집한 자료 중 소실되고 남은 자료를 모으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과 각종 외국 서적을 참고하거나 번역하여 책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외국문헌을 베끼는 데 그치지 않고 외국과 우리 것을 비교하면서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④

유폐 기간과 그 이후에도 그는 고종을 도와 독립 외교를 추구하고 한편으로 서구의 야심을 막아내는 데 주력하였다. 유길준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공직에 복귀하였으며, 그해 일본에 보빙사 사절로 갔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 책의 출판을 의뢰하였다. 《서유견문》은 이듬해 1895년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교순사(交詢社)에서 전체 574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장본으로 1000권이 출간되었다.⑤

그 뒤 그는 《독립신문》을 간행하려고 계획하던 서재필에게 국고금 5000원을 보조하기도 하고, 내정을 개혁하기 위해 쿠데타를 계획하였다가 실패하여 일본에 유배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국민들에게 외국의 사정을 알리고자 《이태리독립전사》, 《정치학》 등을 번역하고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집필하였다.

1909년 54세 때 국채보상금처리회장이 되었다. 그해 12월 일진회에서 한일합방을 하자고 상소하자 이를 반박하는 글을 내각에 제출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의 작위를 받았으나 거부하였다. 그는 1914년 신장염으로 향년 59세로 별세하였다.

《서유견문》 제17편 중 도서관에 관한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도서관은 정부가 설립한 것도 있고, 정부와 국민이 협력하여 세운 것도 있다. 경서(經書)와 역사책과 각종 학문의 서적과 고금의 명화 및 소설로부터 각국의 신문에 이르기까지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다. 외국에서 새로 출판된 책은 사들이고 본국에서 나온 책은 출판사가 각지의 도서관에 한 질씩 보내므로 책의 권수는 해마다 늘어난다. 이와 같이 도서를 수집하여 모아두는 것은 세상에 무식한 사람을 없애려는 데 주된 뜻이 있다. 그러므로 서양의 여러 나라에는 도시마다 도서관이 없는 곳이 없으며, 누구든지 책을 열람하고자 하면 도서관에 가서 마음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고, 다만 독서하고자 하는 학생이 책이 없어서 공부할 수 없을 때는 세를 내고 빌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책을 훼손하면 책값을 변상하여야 한다. 각국 도서관 중 영국 런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프랑스 파리에 있는 도서관이 유명하다. 그 가운데 파리의 도서관이 가장 큰데, 소장한 책이 200만 권이 넘어 프랑스인들은 그 굉장한 규모를 항상 자랑한다.”⑥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국한문혼용체로 썼다. 그는 한글을 ‘우리 글자(我文)’라고 불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우리 글자와 한자를 섞어 쓰고 문장의 체제는 꾸미지 않고 속어를 쓰기에 힘써 그 뜻을 전달하기를 위주로 하였다고 밝혔다. 그는 한글 전용으로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러워 했다. 당시 일반 국민이 개화의 주체로 나서기에는 힘이 매우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주로 지식인이나 관원(官員)에게 배포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서와 문헌정보학도는 한국이 근대 독립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름대로 지식인의 책무를 다했던 유길준에게서 근대 도서관 사상의 맹아를 읽어내고, 그가 역설한 개화의 등급론(개화의 주인ㆍ손님ㆍ노예ㆍ죄인ㆍ원수ㆍ병신)을 오늘날에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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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허경진, 〈유길준과 서유견문〉, 《어문연구》 통권 121권(2004. 3), 438쪽.
② 박상균, 《도서관학만 아는 사람은 도서관학도 모른다》(한국디지틀도서관포럼, 2004), 367~427쪽 참조.
③ 한철호, 〈유길준의 생애와 사상〉, 《한일관계사연구》 제13집(2000. 10), 7쪽.
④ 위의 글, 12쪽.
⑤ 유길준 지음, 허경진 옮김, 《서유견문》(서해문집, 2004), 588쪽.
⑥ 위의 책, 473~4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