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구도서관의 특징은 뭔가요?”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접한 질문이다. 국제기구도서관은 학교도서관, 연구도서관, 공공도서관 등 어떤 구분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도서관인 듯했다.

국제백신연구소(IVI, International Vaccine Institute)는 개발도상국에 필요한 백신을 연구, 개발하고 기술 지원을 통해 전 세계 어린이들의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1997년 UNDP(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의 주도로 설립된 세계 유일의 백신 연구개발 국제기관이다. 최초로 대한민국 서울에 본부를 두어, 최빈국 어린이들의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자는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운영되고 있다.

필자에게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인 국제기구인지라 초기에는 기관의 설립 취지를 최대한 지원할 수 있는 도서관이 되기 위해 새로운 도서관상을 정립하려 하였고, 역사나 규모 면에서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 국제기구를 벤치마킹하며 거창한 사업계획을 수립하였다. 기관의 특성과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기존 도서관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기획한 계획은 현실에서 하나둘씩 문제에 봉착하고 급기야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사서로서 간직하고 있던 자신감을 잃은 것은 물론이요 사서의 역할에 대한 회의까지도 들게 되었다.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기 위해 도서관의 본질인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고 서비스 품질을 두 가지 관점에서 조명한 그론루스(Gronroos)의 ‘기술적 품질’과 ‘기능적 품질’, 즉 ‘무엇을’, ‘어떻게’ 서비스할 것인가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다. ‘무엇을’ ‘어떻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기관 업무의 특징,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도서관 이용자들의 요구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전에 겪은 실패에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이용자들의 요구를 분석한 결과, 이용자들이 도서관에 요구하는 주요 업무는 크게 자료를 제공하는 업무와 기관의 중앙 문서 보관 시스템을 운영하는 업무로 구분할 수 있었다.

먼저 자료 제공 업무에서 우리 기관의 특징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제공하는 자료의 언어와 간행 유형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최빈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진행되므로 영어권 자료에 한정되지 않고 중국 및 동남아 각국의 학술지나 병원 및 보건소, 복지부 등에서 발간되는 통계 자료 등도 제공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연구 자금에 대한 정보만을 별도로 제공하는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를 조사,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영리로 운영되는 만큼 연구비 확보를 위한 기금 관련 정보의 적시 제공은 기관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셋째, 질의응답 등 대부분의 서비스는 이메일을 통해 영어로 이루어지며 도서관 관련 교육 등은 도서관의 일정이 아닌 이용자 개개인의 일정에 맞추어 진행된다. 15개국 이상의 다양한 국적을 가진 직원들이 함께 일을 하며, 연구원들은 수시로 세계 곳곳으로 출장을 다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 제공 업무는 유료 또는 무료 자원을 적극 활용하고 타 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맞춤형 서비스가 기본이 되어야 가능하다.

다음으로 문서 보관 관련 업무는 기관의 연구 성과물뿐 아니라 기관에 대한, 기관에 의한 모든 문서를 조직, 관리함으로써 기관의 역사를 보존하는 역할로 확대된다. 이 업무는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기관에서 생산하는 학술 또는 업무 자료, 홍보용 내부 자료와 기관에 대한 글이 실린 잡지, 신문, 방송 등 매체에서  통한 외부 자료를 구분하여 수집하는 일, 둘째, 기관의 조직과 업무에 맞추어 조직하고 관리하는 일, 셋째, 요구에 맞는 자료를 검색하여 제공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 또한 자료를 생산해내는 이용자 및 외부 자료를 담당하는 부서와 활발히 교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로, 도서관은 기능적으로 조직의 중앙에 위치하여 부서 간, 이용자 간 업무를 연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업무를 분석하고 보니 도서관과 사서의 역할을 명확히 정립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기관 내에서의 기여도가 점차 증가하여 사서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급속한 기술의 발전과 정보량의 성장 속에서 도서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도서관의 변화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도서관은 “온갖 종류의 도서, 문서, 기록, 출판물 따위의 자료를 모아두고 일반이 볼 수 있도록 한 시설”이라는 전통적인 정의에서 벗어나, 이미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진정한 유기체가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여 변화에 대처하고 도서관이 도서관으로 계속 남을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변해서는 안 될 중요한 한 가지 본질은 바로 사서에게 있다. 사서의 본질은 변화하는 환경이 아닌 변화하는 이용자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발전하는 기술에 역할을 내맡기지 않고 그 기술을 활용하여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이다. 환경과 시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서의 본질이 살아 있는 한 도서관의 정체성에 대한 우려는 기우일 뿐인 것이다.

“국제기구도서관의 특징은 뭔가요?”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준비된 답변은 이렇다. “도서관과 사서의 본질에 충실한 것입니다. 여느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도서관은 이용자의 요구에 의해 특징지어질 뿐 기관의 유형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