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이상화 시인은 울분을 토하였지만,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었던 일은 이 땅에 진정한 봄이 오도록 하는 작업이었다.

이범승(李範昇), 1921년 당시 서른둘의 열혈 청년이었던 그는, 서울(당시 경성) 종로 탑골공원 옆에 ‘경성도서관’을 설립하였다. 법학도였던 그가 이처럼 도서관을 설립하게 된 이유는 일제 통치에 대한 울분을 달래고 조선 민중의 계몽과 고국의 문명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1921년 9월 1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종로 탑골공원 부지 531평과 동 지상건물인 구한국 양악대가 사용했던 한식와가와 양악대 숙소 등을 무상으로 대여하여 도서관을 설립하였다.①

그가 설립한 경성도서관은 일제 치하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대로 운영된 근대적 도서관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열람실, 서고, 출납실, 신문잡지실, 휴게실 등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아동열람실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었으며 빈민아동을 위한 초등교육도 실시하였다. 또한 과학실험, 소년구락부, 동화회, 부인강좌 등의 프로그램도 운영하였다. 가히 오늘날 공공도서관의 프로그램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겠으며,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이와 여성을 배려하는 교육활동까지 전개한 점은 더욱 놀랍다.

이범승은 1887년에 충청남도 연기군의 만석 갑부 이기하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일본 제8고등학교를 거쳐 1917년에 일본 쿄토(京都)제국대학 독법과(獨法科)를 졸업하였다.

그는 영어, 독일어, 라틴어, 일어 등 여러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엘리트였다. 따라서 그가 서구 문물과 선진 지식을 깊이 이해하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통탄하고 그 타개책으로 근대적 의미의 ‘도서관’에 주목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이어 그는 경도제대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법제사와 조선법제사를 연구하였으며, 졸업 후 약 2년간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에서 근무하였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큰 뜻을 품었던 이범승은 퇴사 후 경성도서관을 창립하여 5년간 경영하였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지내기도 하고 경성부 학교 평의원에 당선하기도 하였다.

그 뒤 운영난에 처한 경성도서관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끝내 1926년에 경성도서관을 경성부(京城府)에 양도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 식산국 농무과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광복 후 이범승은 미군정 하에서 초대 서울시장(당시 경성부윤)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정치활동을 하다가 1976년에 서거하였다.

이처럼 이범승은 행정가로서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도 성공한 지사였다. 그는 정규 도서관학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학문적 식견과 시대적 사명감으로 공공도서관을 통한 사회발전에 일찍이 주목하고 도서관 운동을 실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30대 초반의 청년이 도서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고국에서 도서관 운동을 실천한 거사(巨事)의 경위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범승은 1919년 4월 29일에 매일신보사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 사장에게 한국에 도서관을 설립하는 일이 긴요함을 주장하는 긴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듬해 일본에서 거행될 예정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영친왕 이은)의 결혼식 기념으로 도서관을 세워줄 것을 과감히 요청하였다. 조국의 왕통(王統)이 일제의 상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일제를 향하여 조선 땅에 ‘민중의 대학’을 설립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식민지시대의 지식인이 애국계몽사상을 실천하는 매우 바람직한 전략이라고 하겠다.

그의 편지는 1919년 5월 17일에서 23일까지 일주일간에 걸쳐 “도서관 설립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그가 쓴 편지 내용 중 일부를 간추려본다.
 

<제1신>

봄의 노곤한 졸음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천칠백만의 조선 사람도 이제야 허둥지둥 곤한 꿈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중입니다. …… 스스로 깨닫는 길은 지식에서 얻게 되고 지식은 책, 학교, 신문 등에서 얻게 되는 것인데 우리 조선의 사정은 아주 적은 학교교육에만 의존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도서관을 개설하여 신교육을 받지 못한 자는 물론 신교육을 받은 자에게도 더욱 활발히 신지식을 매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도서관이 없습니다. 경성을 위시하여 각 도는 물론 각 군에 순회문고라도 두어 일반적 지식을 보급하게 하여 눈을 뜨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략)
 

<제2신>

지식개발에 있어서 학교와 도서관이 서로 도와주어야 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조선에서는 학교만으로는 아직 불완전하여 도서관교육으로써 이를 보충할 필요가 있습니다. …… 도서관에 있어서는 등관자(登館者)에 대하여 수용 연한이 없고 노유남녀(老幼男女)의 구별이 없으며 또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수집하기 불가능한 내외고금의 도서를 비치하여 등관자로 하여금 널리 석학대가(碩學大家)의 학설에 접하고 각국의 문물과 고금 영웅의 공적을 알고 혹은 현철(賢哲)의 사적(事蹟)을 찾음으로써 정신을 수양하여 견문과 학식을 넓히고 인품을 고상하게 하며 세상 형편의 추세를 알고, 시류의 변화를 깨닫게 합니다.②

그의 편지는 도서관의 역할과 운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편지는 한국 도서관사에 또 하나의 ‘경성도서관’을 기록하게 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범승이 경성도서관을 설립하기 한 해 전인 1920년에 윤익선이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취운정에 경성도서관을 설립하였다(이 또한 필자가 《도서관계》 2006년 3월호에 소개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범승의 도서관은 또 다른 경성도서관인 것이다.

그의 편지는 조선총독부를 움직여 2년 뒤 경성도서관 설립이라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업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의 언론은 모두 칭송하는 기사를 실었다. 당시 서울에는 전문학교들이 몇 곳 있었으나 부설도서관이 보잘것없었기에, 윤익선과 이범승의 도서관은 괄목한 만한 것이었다.

이 무렵, 윤익선이 설립한 취운정 경성도서관은 운영난을 겪게 되어 두 사람의 합의 하에 취운정의 도서관을 이범승에게 인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범승은 자신의 경성도서관을 본관으로 정하고 취운정 도서관을 분관으로 하여 도서관을 운영하였다.

1923년에 윤익선이 만주에 간도동흥중학교(間島東興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부임해 감에 따라 취운정의 분관은 문을 닫고 그곳의 도서는 종로의 본관으로 이관되었고, 이범승은 단독으로 경성도서관을 운영하게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범승은 사회교육과 맥을 같이하여 도서관을 경영하였다. 이는 그가 조선 사회의 대중, 특히 아동이나 부녀자 같은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지식욕을 채워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성도서관 안에 아동열람실을 따로 마련하였으며, 소장 자료로 도서 외에 표본, 괘도, 이화학 기구 등을 비치하였다. 또 배우지 못한 어린이들을 위하여 2년제 과정으로 일어, 국어, 산술 등을 비롯한 초등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야간에는 조선여자청년회에 아동열람실을 무료로 대여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한 구가정의 부인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주말에는 5세 이상 보통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소파(小派) 방정환(方定煥), 정홍교(丁洪敎) 등을 초청하여 동화회를 개최하였으며, 부인들을 위하여 학술, 위생, 가사 등 부인강좌를 개설하였다. 그의 경성도서관은 그야말로 ‘시민의 보배’이자 사회적 약자를 위한 학교였던 셈이다.

이러한 경성도서관에 대한 사회 각계각층의 관심과 지원도 계속되었다. 조선도서주식회사가 200여 종의 서적을 기부하고, 독일 유학생들이 돈을 모아 독일의 고전, 문학, 철학전집류 등 300여 권을 기증하고, 미국 한인교회에서 도서를 기증하는 등 경성도서관에 대한 조선인의 애정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도서관 사업은 본질적으로 돈이 들어가고 원칙적으로 수익은 있을 수 없으며, 그 활동 폭이 넓어질수록 재정 압박을 받게 되는 일이다. 이범승이 온 정열과 사재를 바쳐 운영하던 경성도서관도 결국 은행부채 문제를 비롯한 운영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민족 언론과 조선청년학생들의 뜨거운 호소에도 불구하고 1926년에 경성부(京城府)로 그 운영권이 넘어가게 되었으며, 그 명칭도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으로 개칭되었다.

세월이 흘러 이범승은 해방 후 초대 서울시장이 되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먼저 서울시립도서관 설치 조례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예전의 도서관을 ‘서울시립종로도서관’으로 승격시켰다. 이 도서관은 1946년에 서울특별시의 승격과 동시에 ‘서울특별시립 종로도서관’으로 개칭되었으며, 1968년에 현재의 사직공원 자리로 이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1년에는 이범승의 업적을 기려 도서관 앞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나, 동상 제막식에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질곡의 한국 근현대 역사에서 그는 선각의 지식인으로서 공공도서관 운영을 통하여 한국사회의 계몽과 민주화를 도모하였다. 오늘날에도 도서관이 사회발전에 필수적인 기관으로 굳건히 자리 잡지 못한 현실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그의 도서관사상을 항상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

① 박상균, <도서관학만 아는 사람은 도서관학도 모른다>(한국디지털도서관포럼, 2004), 406쪽.
② 위의 글, 403~4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