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인물탐구

 






엄대섭 선생은 현대 한국 도서관운동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큰 인물이다. 필자는 지난 호에서 박봉석 선생을 소개하였는데, 박봉석 선생 이후 도서관계의 대표적인 선구자로 단연 엄대섭 선생을 들 수 있다.

박봉석 선생이 국립도서관의 부관장을 맡아 한국 도서관사에서 분류와 편목 등 실무의 체계를 잡았다면, 엄대섭 선생은 공공도서관의 뿌리가 될 마을문고를 전국 곳곳에 만들었다. 간송(澗松) 엄대섭 선생도 박봉석 선생에 이어 2004년도에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엄대섭 선생은 불타오르는 도서관 정신 하나로 ‘민중의 대학’인 마을문고를 전국 농어촌에 세웠던 위대한 인물이다. 또 전국에 3만이 넘는 ‘작은 도서관’인 마을문고를 설립하는 운동을 전개한 개척자며 전략가다. 한편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성공한 사업가였으며, 동시에 책과 도서관에 마음을 뺏긴 사상가다. 선생의 업적에 대해서는 최근 《도서관계》와 여러 문헌에서 조명하고 있지만, 그의 도서관 사상과 실천에 대해서는 수천 번 언급해도 모자랄 것이다.

선생은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그가 만일 한국 도서관계를 위해 헌신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강철왕 카네기와 같은 재벌이 됐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이재(理財)에 밝았으며,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특별한 아이디어를 내 재산을 축적하였다. 여기서 그의 성장과정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자수성가하였다.

선생은 1921년에 경남 울주군(지금의 울산)에서 소작농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소작이 떨어지고 생계가 막연하여 고향을 등지는 부모와 함께 여덟 살 때 일본 땅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공사장을 번갈아 돌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어느 날 아버지는 제철소에서 일하다 중상을 입고 불구가 되었다. 열네 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동생들까지 책임져야 했기에 어머니와 함께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당시 그의 꿈은 논 열 두락만 있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잘 살 수 있다는 부모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두부장수, 세탁소 점원, 방직공장 직공 등 닥치는 대로 잡역을 해가며 자나 깨나돈 벌 궁리를 하였다. 돈을 더 벌기 위해 폐품 모으기 행상을 하던 그는 어느 날 기발한 착상을 한다.

당시 일본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일용품 공급을 최대한 통제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서민들은 겉옷은말할 것도 없고 내복, 노동복 따위를 구하기조차 힘들었다. 이때 그는 부잣집에 사장되어 있는 헌옷을 구하여 서민들에게 공급할 생각을 한다. 그는 색종이를 구하고, 고급인쇄를 하여, 다음과 같은 그럴싸한 편지 형식의 광고문을 만들었다.

비상시국인 이때, 부유하다 해서 헌 옷가지를 버리지 마십시오. 다시 활용할 수 있는 낡은 옷가지를 사들이기 위해 모월 모일 모시에 귀하의 집에 들르고자 하니 많이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이 사업으로 일 년도 채 못 되어 백 두락(2만여 평)을 살 수 있는 큰돈을 벌었다. 이렇게 하여 열아홉의 나이로 그는 고국 땅을 밟았다. 경주 지방에 백여 두락의 논도 사고, 경주 시내에 아담한 기와집도 사고, 고향 울산 앞바다에 있는 멸치 어장도 사들였다.

둘째, 그는 정규교육보다는 책읽기를 통한 독학으로 자기성취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공사장 인부로 전전하는 부모를 따라 다니느라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겨야 했고 졸업조차 제대로 못하였다. 뒤에 야간 상업학교에도 적을 두긴 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충실할 수 없었다. 그 대신 틈만 나면 책을 구해서 읽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으며,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책을 쉬지 않고 탐독하였다. 그는 배움에 대한 욕망과 가난에서 오는 외로움을 책이 달래주는 것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지식만이 인생에 성공을 가져온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셋째, 선생에게는 결정적인 인생의 계기가 몇 번 있었는데 대체로 그때마다 책에서 받은 영감이 컸다.

그는 어떤 교양 전서에서 “남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같은 일이라도 남이 안 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한다”는 대목을 읽고 자극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책을 ‘단순한 교양이 아닌 생존경쟁의 무기로’ 또는 ‘만능의 신’으로 생각하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도서관운동에 몸을 던지게 된 동기도 책 한 권이 끼친 영향 덕분이라고 한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선생은 책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 고서점을 돌아다니던 중 1950년 어느 여름날 부산 시청 앞 고서점에서 책 한 권을 샀다. 《도서관의 운영과 실제(圖書館の運營と實際)》라는 오래된 일본 책이었다. 내용은 사립 공공도서관의 운영법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선생은 도서관운동이야말로 자신이 평생 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사업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진4 1970년도 열린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도서관 및 마을문고 지도자 세미나’에서
          엄대섭 전 회장이 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5 1981년 엄대섭 전 회장이 마을문고에 대한
          공로로 막사이사이 상(사회봉사부문)을
          수상 했다(왼쪽에서 두 번째는 엄회장,
          네 번째는 막사이사이 대통령 부인).
          사진 안의 동그라미는 막사이사이 상 메달.

가난으로 온갖 고생을 겪었고, 성장과정에서 책을 통하여 지식과 위안을 얻었으며, 또 기발한 착상으로 젊은 부자가 된 선생은 압제와 굴욕에서 해방된 조국이 좌우익의 와중에 놓여 있는 동안 인생의 좌표를 찾고 있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생을 걸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조국의 고향에서 그는 근대 도서관 사상을 실천에 옮긴다. 선생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1951년 6월 경남 울산군에서 개인 장서 3000여 권을 토대로 사립 무료도서관을 세우고 근처 주민들에게 이용하게 하는 한편, 군내 전 농어민을 대상으로 하기 위해 50여 개의 순회문고를 마련하여 농어촌 지대에 봉사했다. 이때 순회문고함으로 폐품 탄환상자를 수집해 활용했다.

오늘의 마을문고를 창안하게 된 동기는 이 탄환상자에 도서관 책 열 권 정도씩을 넣어 농어촌 주민들에게 돌려가며 읽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운동은 당시 농어촌의 독서인구가 아주 적었고, 또한 그들에게 읽힐 도서가 적어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울산도서관의 모든 도서 및 시설을 경주시에 기증하여 그것으로 경주 시립도서관을 세우고 10년간 관장직을 맡아보았다.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장직의 심부름을 맡고 연세대학교에서 도서관학을 연구하면서도 계속 농촌문고라는 이름으로 농어촌에 ‘책보내기’ 운동을 실시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

책보내기 운동의 실패는 충분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농어촌의 독서운동은 주민 스스로가 자조, 자립적인 운동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뒤떨어진 사회의 농어촌일수록 독서운동은 책을 무료로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10여 년간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드디어 1960년 12월에 ‘마을문고 아이디어’를 창안하게 되었다.”

엄대섭의 ‘마을문고 아이디어’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책을 넣어 관리할 수 있는 책장이다. 둘째는 열네 살 이상의 청소년을 중심으로 하는 독서회다. 셋째는 쉽고 재미있고 유익한 선정도서이다. 이렇게 세 가지를 기본요소로 하였다.

도서관의 기본요소인 ‘시설, 인력, 장서’를 기본개념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로 1961년 2월에 ‘농어촌마을문고보급회’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이 모임은 1962년에 ‘마을문고진흥회’, 1968년에 ‘마을문고본부’로 개명한다. 이러한 마을문고 운동은 20여 년 동안 맹렬히 추진되었다.

1961년 첫 해에 26개였던 마을문고는 1968년에 만 개를 돌파하였으며, 1971년에 2만 개를 넘어서고, 1974년 말에는 3만 206개 촌락에 3만 5011개의 문고가 만들어졌다.

마을문고 운동은 단계적으로 상승을 거듭하였으며, 그 단계마다 선생은 보람과 희열, 동시에 재정에 대한 압박감을 겪었다. 재정난에 봉착할 때마다 선생은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들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고비를 넘긴다.

1960년대 후반에는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을 6개월 만에 설득시켰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본부를 바친다는 비장한 각오로 백 개 대기업을 상대로 사업인수를 호소하였다. 다행히 1978년에 마을문고의 소관부처가 문교부에서 내무부로 바뀌어 사업비와 운영비 전액이 보조된다.

1980년은 그의 일생 가운데 가장 큰 희비가 엇갈린 해였다. 6월 18일에 아내와 사별하게 된 선생에게 8월 9일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 상’ 공공봉사 부문의 수상 소식이 날아왔다. ‘막사이사이 상’은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전 대통령을 기려 제정된 상으로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릴 정도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다.

막사이사이 상 수상을 계기로 마을문고 본부는 항구적 재정 안정을 모색하기 위해 청와대와 접촉하였다. 이후 마을문고는 1981년에 새마을운동중앙본부에 정식회원단체로 가입하여 새마을운동 체재로 전환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에서 엄대섭 선생의 일생을 통하여 도서관사상과 마을문고 운동에 바친 숭고한 뜻을 살펴보았다. 물론 지면이 한정되어 마을문고 운동의 자세한 역사적 변천은 약술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 글에서 필자가 소개한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선생의 마을문고 운동은 현대 한국 도서관 운동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선생의 기발하면서도 장대한 마을문고 운동은 한국 사회 전역에 근현대적 의미의 ‘작은도서관’을 심어 놓았다.

그의 도서관 사상, 책과 사람에 대한 사랑, 그리고 불굴의 의지와 전략 등은 오늘날에도 귀감이 될 것이다.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전역에 진정한 의미인 주민생활 속에 깃든 ‘작은도서관’을 만드는 일과 더 나아가 도서관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일 것이다.   

사진출처 : 사진1~5 《새마을문고운동 40년사》, 새마을문고중앙회, 2000.
                  사진6  Library Journal Vol. 91, No. 21 1966, p.6037.

① 이용남 교수(한성대 지식정보학부)의 회고, 도서관운동 편집부, 〈엄대섭, 그는 누구인가〉, 《도서관운동》 제4권 제3호
    (1998. 9), 97쪽.
② 박상균, 《도서관학만 아는 사람은 도서관학도 모른다》(한국디지털도서관포럼, 2004), 485쪽.
③ 박상균, 《도서관학만 아는 사람은 도서관학도 모른다》(한국디지털도서관포럼, 2004), 487쪽.
④ 새마을문고운동 40년사 편찬위원회 편, 《새마을문고운동 40년사》(새마을문고중앙회, 2001), 37쪽.
⑤ 새마을문고운동 40년사 편찬위원회 편, 《새마을문고운동 40년사》(새마을문고중앙회, 2001), 38쪽.
⑥ 엄대섭, 〈마을문고의 활동〉, 《도서관》 108호(1966.8), 13~14쪽.
⑦ 이연옥, 《한국 공공도서관 운동사》 (한국도서관협회, 2002), 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