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 도서관에 얽힌 기억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몇몇 공간들에 대한 기억

사람들은 어린아이였을 때는 빨리 커서 어른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시절과 동심을 그리워한다. 그렇듯이 학창시절에는 얼른 얼른 졸업해서 학교를 떠나는 게 그때의 소원이지만, 막상 그 시간을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때 아닌가 싶다.

얼른 지나고 싶은 학창시절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우리의 기억을 환하게 밝혀주는 몇몇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그런 기억들은 사람, 사물, 사건들과 관련을 맺기도 하지만 때로 어떤 공간과 관련되어 떠오르곤 한다. 이번 호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공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광화문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가다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잠시 멈춰 섰다가 경희궁을 한 바퀴 휘 돌고는 지금은 경향신문사가 들어선 옛날 정동라디오방송국 건물을 끼고 돌면 흔희 정동길이라고 불리는 골목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풍문여고, 이화여고의 서쪽 교문이 나온다.

이화여고의 교정은 계절마다 다른 빛깔과 느낌을 주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모 방송국 주말드라마도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을 했을 만큼 교정 곳곳은 추억과 비밀을 담을 만한 장소로 가득하다.

그런 공간 가운데 이화여고의 학교도서관은 정말 부러운 공간 가운데 하나다. 웬만한 대학도서관보다 넓고 아름다운 학교도서관은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안에서 책 읽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행복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화여고의 서쪽 교문을 지나 길을 따라 더 내려가면 서울시립미술관이 나오고, 서울시립미술관 앞에는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빨간 공중전화 박스가 있다.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 맞은편으로는 덕수궁 돌담길이 운치 있게 펼쳐져 있고, 큰 길로 나서면 시청 잔디밭에 다다른다.

이렇듯 좋은 산책 코스이기에 그야 말로 뜬금없이 머릿골 복잡한 주말 오후에는 종로의 인사동부터 시작해 광화문의 서점을 지나 시청과 남대문까지 휘휘 다리운동을 해봄도 괜찮을 듯하다. 복잡한 세상살이와 한여름 땡볕은 아스팔트와 시멘트 바닥에 맡겨버리고 온 마음을 녹색물감 뿌려놓은 것 같은 나뭇잎과 시원한 한낮의 바람결에 던져보자. 더불어 동행할 만한 친구가 있다면 그 이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다.

청소년 시절에 자신을 살찌우고 따습게 할 만한 도서관이 하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도서관이 학생들이 자주 머물고 가장 오랫동안 지내는 학교에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 학교도서관에서 친구와 논술공부를 하고, 토론을 하며 교과 심화학습을 할 수 있다면 비싼 과외비나 학원비를 들이지 않고도 입시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학교도서관이 방과후학원이 되고, 학교도서관이 논술과 수능을 준비할 수 있는 과외교사의 역할을 해준다면 학교를 떠나려는 학생들도 줄어들 것 같다.

요즘 고등학교 중퇴바람이 분다고 한다. 그리고 중고등학교를 아예 가지 않고 초등학교를 마친 후 검정고시로 대학에 일찍 들어가는 학생들도 많다고 한다. 재미없는 학교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학교도서관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줄 아름답고 정겨운 학교도서관이 있다면 사회인이 되어서도 그 도서관을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 인생에 꿈을 담을 지도를 그려준 학교도서관, 아름다운 등꽃과 붉은 벽돌, 담쟁이넝쿨, 마음을 탁 트이게 해주는 노천광장, 우정을 나누던 돌 의자…. 때로 어떤 기억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준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그런 학교도서관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끔찍하면서도 불행한 일인 것 같다.

꿈 많고 낙엽 굴러가는 소리에도 깔깔거린다는 학창시절이건만, 어른들보다 더 바쁘다는 요즘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학교란 어떤 곳일까 생각해본다. 학교 운동장은 점점 좁아지고 교실로 가득 찬 건물만 으리으리하게 세워진다는데, 과연 학교도서관에 신경을 써서 공간을 배려할지 의문이다. 그리고 교정을 예쁘게 다듬고 가꿀지도 역시 의문이다.

이제 학생들에게 그들이 누려야 할 아름다운 기억을 되찾을 권리를 되돌려 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학교에서 뛰어놀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친구와 소곤거리며 해질녘이면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던 기억들, 지금 우리 학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