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도서관계를 클릭하시면 목차로 돌아갑니다△

 

 

엄대섭 선생의 업적을 기리며

조 재 순 │국립중앙도서관 사서

지난 10월 20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간송 엄대섭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은관문화훈장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작년에 고 박봉석 선생이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은 데 이어 우리 도서관계의 두 번째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엄대섭 선생은 1955년에 한국도서관협회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전쟁 이후 더욱 피폐해진 우리나라 도서관계를 중흥시킨 분이시다. 특히 1960년대, 70년대에는 전국의 유일한 민중대학이라고 스스로 일컬었던「마을문고」를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 운영하여 농촌독서운동에 앞장을 섰던 분이다.

엄대섭 선생은 1921년 1월 21일 경남 울주군(지금의 울산)에서 태어났다. 빈한한 가정에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생계가 막연하여 8세 때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설상가상 공사장의 인부로 일하던 부친이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는 바람에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들까지 책임져야 했다. 두부장수, 세탁소 점원, 방직공장 직공 등 온갖 험한 일을 마다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아이디어 하나로 사업에 대성공을 하였다고 한다.

평소 남들이 이상히 여길 정도로 틈만 나면 책을 구해 읽던 그는 어떤 책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남의 흉내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같은 일이라도 남이 안 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야 한다"는 대목을 읽고 그는 남이 안하는 방법을 골똘히 생각한 결과 아주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일용품의 공급을 통제하고 있었던 까닭에 의류가 매우 귀한 상황이었다. 일반 서민들은 내복이나 노동복, 겉옷 등을 구하지 못해 애를 쓰고 있는 반면에 부유한 집에서는 낡지도 않은 헌옷을 다락에 쌓아둔 채 사장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묘한 착상을 하여 "...... 비상시국 하에 부유하다 해서 재활용할 수 있는 헌 옷을 사장해서 좀먹혀 버리는 것은 비국민이다. ...... 이러한 고의류를 매입하기 위해서 모월 모일 모시에 귀댁에 들르고자 하니 많이 이용해 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의 광고문을 만들어 부유층 집집마다 돌렸다. 그리하여 이들이 입지 않는 헌 옷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일반 서민들에게 되파는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데 성공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부모의 평생 원이었던 논 열 두락의 열 배 이상을 경주에 장만하는 등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그는 책을 단순한 교양만이 아닌 생존경쟁의 무기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도서관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도 책 한 권에서 비롯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엄대섭 선생이 대학을 다니던 1950년 어느 여름날의 일이다. 부산의 고서점에서『圖書館의 運營과 實際』라는 오래된 일본책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한 권의 책이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즉 그에게는 사업에 있어서나 인생 진로에 있어서나 책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1951년에 자신이 갖고 있던 3천여 권의 책으로 울산에서 사립 무료도서관을 열었다. 그는 농민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자 당시 전쟁의 부산물인 탄환상자를 이용하여 50개의 순회문고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마을문고의 불씨가 되었다. 1955년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장이 되어 농어촌 책보내기 운동을 전개하던 그는 1961년 초에 <마을문고보급회>라는 단체를 설립하였다. 마을문고 회장에 취임하면서 도협 사무국장과 경주도서관장직을 사임한 그는 본격적인 문고 설치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는 민중과 유리된 후진국 공공도서관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을 스스로 조직하여 마을단위 소규모 독서시설을 운영하며 육성하도록 하는 마을문고 운동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확신하였다.

마을문고는 선생이 전재산을 바쳐가면서까지 농촌의 독서진흥을 위해 진력한 덕택에 1968년에는 1만개 설치를 돌파하였으며, 1971년에 2만개, 1974년에 3만개를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경찰의 뒷조사와 의혹의 눈초리, 심지어는 선거출마를 위한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겠느냐는 세간의 의구심에 보통사람 같았으면 벌써 그만두었을 일을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추진하던 마을문고 사업은 외국의 도서관계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4년에는 일본도서관협회에서 한국의 마을문고를 조사 ㆍ 연구하기 시작하여『마을(촌락)문고 조사연구보고서』(1987)가 출간되기도 하였다. 이는 평생 농촌 대중도서관 운동에 헌신해 오던 일본의 원로 도서관인인 나미에 겐(浪江 虔) 씨가 자신도 실현시키지 못했던 농촌문고활동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본의 도협에 임시위원회를 설치하게 됨으로써 실현되게 된 것이다.

한편, 1980년은 엄대섭 선생 개인은 물론 한국 도서관계에 있어서도 경사스러운 해였다. 엄대섭 선생이 막사이사이 상 공공봉사 부문의 수상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마을문고와 도서관의 가치, 중요성을 널리 사회에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막사이사이 상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데, 1957년 항공기 사고로 숨진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 전 필리핀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지역사회지도, 공공봉사, 평화 ㆍ 국제이해 등 6부문에 걸쳐 5만 달러의 상금과 메달이 수여되며 한국에서는 1962년 장준하를 비롯하여 2002년 법륜스님에 이르기까지 13명이 수상한 바 있다.

마을문고는 1981년 새마을운동 조직에 흡수되어 새마을문고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또한 마을문고보급회는 새마을문고중앙회라는 조직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마을문고의 창시자이자 농촌독서운동을 전개하던 엄대섭 선생의 뜻은 여전히 살아 있으리라 믿는다. 현재 엄대섭 선생은 한국을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계시다고 한다. 오랫동안 무병장수하시기를 빌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국의 도서관이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그 분께 보여드리는 것일 것이다.

Newsletter of Libraries 20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