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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南이 프랑스와 和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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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저자사항
安南이 프랑스와 和議하다
발행사항
서울 : 博文局, 1883
형태사항
전자자료(image)JPEG第一號 : 이미지파일 20개 (3M)
주기사항
순간
연호 : 朝鮮開國四百九十二年
발행일 : 西歷 一千八百八十三年 十月 三十一日
창간일 : 18831031, 陰曆 一千八百八十三年十月初一日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원문 파일을 기증받아 이미지 파일로 변환하였음
원소장처 : 관훈클럽
수록자료: 漢城旬報 9면 1단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표-박봉석편-> 084
자료이용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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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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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내용/해제내용

[초록]

8월 1일자 上海新報에 의하면, 法國(프랑스) 군사가 越南 都城을 포위한지 10여일만에 월남 사람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砲擊을 받아 都城이 함락되자, 大臣들이 줄을 이어 프랑스 軍門에 나아가 休戰 和議를 청하므로 프랑스의 欽差 全權大臣 夏가 월남의 使臣과 함께 順化城(후에 Hué)에서 화의조약을 체결하였는데, 모두 13조가 된다. 즉, 제1조에는 프랑스가 월남 東京(통킹)을 보호하는 문제는 월남이 이미 전폭 인준하였음을 말하고, 제2조에는 平順省은 영원히 프랑스의 관할에 귀속시킬 것을 말하고, 제3조에는 雲角·通安 두 군데의 砲臺 역시 영원히 프랑스의 據守에 귀속시킬 것을 말하고, 제4조에는 현재 통킹에 있는 월남 군사는 의당 월남 朝廷에서 속히 불러들이되, 다만 소수의 군사만을 머물러 두어서, 昇平에 있었던 예와 동일하게 할 것을 말하고, 제5조에는 현재 월남의 官吏들은 각기 본 임무로 돌아가 공무를 처리하되, 다만 프랑스 官員의 심사를 거쳐서 그 거취를 결정할 것을 말하고, 제6조에는 프랑스 사람은 월남의 각처 要塞地에 군대를 보내 엄밀히 경비하여 프랑스의 商民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할 것을 말하고, 제7조에는 월남의 각처 海關 稅務는 일체 프랑스의 관리에 귀속시킬 것을 말하고, 제8조에는 통킹에서 곧장 河內(하노이)까지 陸路의 電線을 가설할 것을 말하고, 제9조에는 후에는 영원히 프랑스 사람들의 住居地로 할 것을 말하고, 제10조에는 지금으로부터 프랑스의 官員은 월남왕과 직접 만나서 공사를 상의할 수 있도록 할 것을 말하고, 제11조에는 紅江(송코이강) 西岸에 영원히 프랑스 군사가 주둔할 것과, 적절한 지역에 砲臺 건축을 인준할 것을 말하고, 제12조에는 英洋[銀貨의 일종]과 월남서 주조한 銀錢은 월남 全城에서 다같이 通用할 것을 말하고, 제13조에는 通商에 관한 각 사항은 이 다음 상의를 거쳐 결정한다고 말하였는데, 체결된 이 화의조약은 프랑스 공사가 이미 프랑스 總統에게 郵送하여, 그 결재를 받아 시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論評하는 이는 『이번의 조약은 월남이 일일이 남의 결제를 받게 되었으니, 그러고서야 어떻게 自立할 수 있겠는가』 한다. 대저 적병이 城下에 임박하였을 때 머리를 숙이고 화의를 비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지만, 다만 越裳[옛날 安南 남부에 있던 나라 이름] 옛 나라가 이처럼 침체된 것이 애석할 뿐이다. 社少陵[唐의 社甫]의 「炎風朔雪天王地 祗在忠良翊聖朝」라는 詩句를 외면, 깊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또, 상고하건대, 安南 역시 東洋의 한 나라로 북쪽으로는 중국의 雲南·廣東·廣西 세 省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暹羅(태국)를 경계로 하고,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고, 都城은 후에로 富良江 南岸에 위치하였으며, 동서의 너비는 1천7백여리이고, 남북의 길이는 3천여리이며, 人口는 1천7백여만이니, 그 國王된 이가 紀綱을 확립하여 內政을 닦고 外敵을 물리친다면, 충분히 自守하여 國脈을 유지할 수 있다. 또 國內의 두 개의 큰 河水가 다 雲南省에서 發源되어 本國을 통과하여 바다로 흘러든다. 즉 湄公河(메콩강)와 송코이강의 두 하수는 진정 오늘날 亞細亞 동남부의 좋은 항구자리이니, 時勢에 능한 이가 나서서 通商사무를 개발한다면, 富國强兵하는 정책이 어렵지 않게 착착 진행될 것인데, 애석하게도 安南에 그럴만한 인물이 있지 않으므로 두 하수가 그대로 방치된지 오래이다. 아, 海禁[해안에 외국 선박이 들어오거나 외국인이 와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금하는 일]이 한 번 해이해지자, 西洋사람들이 갑자기 쇄도하여 좋은 항구임을 첫눈에 알아보고 모두 침을 흘렸다. 그러나 적당한 구실이 없어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가 咸豐 8년(1858년)에 프랑스 사람들이 자기네의 敎士를 학살했다 하여 兵力으로써 위협, 억지로 조약을 체결한 뒤에 스스로 柬蒲寨(캄보디아: 前크메르)를 점령하고, 西貢(사이공)에 정부를 설치하여 「사이공政府」라 일컫고는 메콩강에 通商해 온지가 오래이다. 이어 송코이강의 通商이 매우 편리한 것을 보고 나서, 西紀 1873년에 일부의 군대를 출동, 元帥加尼爾(가르니에 M. Garnier)에게 주어 하노이를 침략하여 이내 점령하였는데, 때마침 黑旗黨 사람들이 安南에 있었으므로 黑旗黨에서 가르니에를 攻殺, 프랑스 군사를 격퇴하고 프랑스 敎士들도 모두 살해하였다. 프랑스에서 다시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하려 하였으나 安南王이 『조상의 땅에 외국의 군사를 용납할 수 없다』 면서 단호하게 나오므로, 프랑스 사람들이 그 이듬해에 월남과 다만 보호조약을 체결하였고, 더 이상 安南에 주력하지 않았다. 대저 黑旗黨의 괴수는 劉義란 자로 본시 粤省 土匪의 餘黨이었는데, 중국이 혼란한 시기를 만나 변방에 쫓겨 났다가 安南으로 도망쳐 들어와서 세 省의 땅에 割據하여 스스로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安南 조정에서는 그가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하여 그대로 방치해 두므로, 드디어 그곳에서 屯田을 시작하여 거기서 나오는 곡식으로 군량을 공급하면서 休養과 生息을 거듭한지 20년이 되었고, 또 英俊들을 맞아들여 帳下에 두므로 文武의 인물이 충분히 驅使에 대비할수 있게 되었다. 사실 프랑스에서 통킹을 넘겨다 보아 온지가 어제 오늘이 아니었으나 섣불리 나서지 못한 것은, 다만 劉義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선 安南을 보호한다는 명분에 假託하여 안남과 조약을 체결해 놓고, 서서히 兵力을 써서 黑旗黨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安南에서 도리어 劉義를 이용하여 프랑스 사람을 공격하므로 프랑스에서 원한을 품었고, 다시 전번의 조약을 내세우면서 『우리 프랑스는 1874년에 체결한 화의조약을 준수하려는것 뿐이다. 만약 전번의 조약대로만 된다면, 우리가 스스로 안남 全域을 차지할 수 있고, 겨우 「보호」뿐이 아닐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 安南은 옛날부터 자기네의 속국이라 하지만, 强國으로서 强國에 進貢하는 것은 속국으로 취급할수 없다. 옛날에 那卜列司(나폴리 Napoli)도 羅馬(로마)敎王에게 進貢하였으나 로마에서 똑같은 列國으로 대우하였으니, 安南이 아무리 중국에 入貢한 적이 있었으나 중국에 무슨 일이 있을 때 安南에서 군사를 일으켜 도운 적이 없었고, 또 안남도 국토가 있고 국왕이 있으니 어엿한 自主國인 것이다. 더우기 중국에서는 안남에 대해 明나라 이래로 일절 顧問해온 적이 없었으니, 세계 만방의 公法에 의거하여 중국에 질문해 보아도 좋다. 즉, 전자에 프랑스 황제 綠意思(루이 Louis)14세가 안남과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중국에서 언제 이를 따진 적이 있었으며, 루이 18세가 安南 도성에 領事를 파견하였으나 중국에서 언제 이를 따진 적이 있었으며, 안남에서 우리 敎士를 살해한 때문에 우리가 안남을 공격하였으나 중국에서 언제 이를 따진 적이 있었던가. 西紀 1862년에 우리가 안남과 조약을 체결할 적에도 중국에서 이를 불고하였으며, 우리가 안남과 조약을 체결하고 사이공을 차지한 바 사이공 역시 통킹과 마찬가지로 안남의 영토이고 우리가 안남에서 전개한 일들이 陰性的인 것도 아니었는데, 중국에서 어찌 이를 모를 리가 있겠으며, 1874년에 우리가 안남과 새로 체결한 조약중, 제2조에 우리 프랑스는 안남이 자주국으로서 외국의 간섭이 있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프랑스가 안남을 보호하기로 한다 하였고, 제3조에 안남은 이미 프랑스의 보호를 받기로 약정한 이상, 프랑스와 우호조약이 체결된 다른 나라에게도 안남에서 똑같이 대우하기로 한다고 약정하여, 이를 중국의 總理衙門에 보냈으나 중국에서 역시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때 중국에서는 꼭 우리가 안남에서 멀리 떠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안남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실 불편만 있을 뿐이다. 즉 琉球島 문제에 대해 중국과 일본이 서로 자기네의 屬地라고 다투어 거의 전쟁까지 벌일뻔 하였다가, 아직껏 어느 나라에 소속되었는지 그 결정이 없지 않은가. 프랑스와 중국은 그 의도가 두 갈래로 분류되어, 절대로 안남의 일을 함께 상의할 수 없다. 현재 프랑스에서 이를 조속히 스스로 단행하고 중국과 상의하지 않은 것은, 통킹을 나눠서 다스리자는 중국의 제의가 가장 적절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럼 프랑스에서 안남을 차지한들 중국이 우리에게 어찌하겠는가. 능히 우리 프랑스와 맞서서 전쟁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이밖에는 거의 중국의 兵船과 軍機는 잘 사용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등의 헐뜯는 말 뿐이었다. 또 『프랑스에서 雲南 지방을 차지한다면 안남을 治安하고 商務를 유통시킬 수 있으며, 黑旗黨도 다시 날뛰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니, 프랑스 사람들의 말이 대충 이러하다. 대저 屬國에 대한 체통은 중국과 西洋이 각기 다르다. 중국에서 말하는 속국은, 나라와 君主만 세우는 데에만 天朝의 勅命과 중국의 절제를 받을 뿐, 기타 일체의 進退나 官僚의 交替와 商務·軍務와 國內에 있는 政務를 중국에서 전혀 간여하지 않고 편리할대로 내버려 두며, 다만 王朝에 대한 悖逆이 있을 적에는 군사를 보내 토벌하여 그 죄를 밝히고, 만약 悖逆이 아니면 모두를 자유에 맡길 뿐, 중국에서 절대로 직접 문책하는 예가 없다. 하지만 西洋에서 말하는 속국은 바로 漢·魏 시대의 藩王과 같아서, 그 國內의 行省[지방관서]이나 王位의 廢立만을 大國에서 주관할 뿐 아니라, 평소의 錢粮이나 稅額도 다 大國에서 官員을 파견하여 監收하고, 군사를 징벌하는 데도 다 大國에서 檄書를 보내 그 進退를 결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官僚를 임명하고, 錢粮을 지출하고, 政令을 발표하는 데 속국에서는 조금의 권한도 없고, 일체 大國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이와 같아야만 속국이라 이를 수 있다. 만약 그 나라의 政令이 그 君主에게 서 나온다면, 이는 바로 自主國이 되므로 속국이라 일컬을 수 없고, 이미 속국이라 일컬었다면, 그 나라의 政令이 일체 大國에 귀속되어야 당연하다. 만약 그 나라의 모든 일이 大國에 귀속되지 않는다면, 속국이라는 의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이 이것을 핑계로 내세로 아무 年度에 아무 사건을 중국에서 묻지 않았고, 아무 연도에 아무 싸움도 중국에서 알지 못했다고 하니, 그들의 臆說과 妄動을 이루 다 힐책할 수 없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속국을 대우하는데 그 도리가 있다. 즉, 중국에 스스로 그 제도가 있으니, 굳이 西洋의 예를 끌어대어 同一化시킬 필요가 없다. 또한 수백년 동안 복종해 온 藩邦[여기선 安南을 일컬음]에 대해 그 위태로움을 袖手傍觀할 수 없으므로, 李傳相[李鴻章]이 처음에 寶星使[부링]와 더불어 안남을 함께 보호할 것을 熟議하여 화의가 거의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보다 먼저 메콩강을 探査한 프랑스 商人이 월남의 內地와 중국의 滇池에 富饒한 鑛産을 탐내어 그 나라의 外務大臣을 종용, 事變을 격화시켜 부링公使가 갑자기 해임되기에 이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또 중국의 欽差大臣 會侯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가서 프랑스의 非理를 연설하였으나 프랑스에서 끝내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다시 德國(獨逸) 정부에 이를 調停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독일 정부에서 그럴 능력이 없다고 사양하였고, 영국과 러시아에서도 이를 調停하지 못하였으며, 美國에 대해서는 접때 李傳相이 美國大使와 함께 프랑스 대사 德固理(드그로 De Gros)를 滬上에서 만나 회의를 거듭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그냥 서울로 돌아가 復命한 뒤로는, 중국의 거동이 일절 없으므로 프랑스 군사가 黑旗黨을 상대로, 혹은 海防(하이퐁)에서, 혹은 南定에서 交戰하여 勝敗가 빈번하였고, 금년 4월에는 프랑스의 元帥 李威利(가르니에 M.F. Garnier)가 경솔히 하노이에 침입하였다가 마침내 흑기당 劉義의 伏兵서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 敗報가 프랑스 수도에 알려지자, 온 軍民이 모두 분노하여 기어코 이를 雪恥하려 하므로, 프랑스 정부가 議院회의를 크게 열고 軍費 5백만佛郞[프랑: 프랑스 화폐의 단위]을 지출, 陸海軍 15만명과 戰艦 40여척을 뽑아 2隊로 분류하여, 1隊는 順化城을 포위하는데, 또 1隊는 흑기당을 소탕하는데 투입하여, 예의 공격하여 완전 승리를 거두고야말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마침 무더운 여름철이라 전쟁에 불리하므로 陣營을 고수할 뿐, 곧장 나와서 싸우지 못하였고, 흑기당도 內地로 퇴각하여 감히 더 이상 맞서지 못하였다. 안남 국왕은, 프랑스 사람들이 독기를 내뿜은 터이라 지금은 군사를 거두고 움직이지 않으나 가을만 되면 곧장 쳐들어 올 것인데, 중국에서는 이미 지원해 줄 뜻이 없고, 흑기당 또한 세력이 고단하여 끝내 프랑스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을 잘 아는 터이므로, 걱정이 그만 병이 되어 이내 죽고 말았다. 그러나 안남의 大臣들은 이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오히려 公事를 잊고 이익만을 추구하여 상호 당파를 만들어 권력을 다투므로 國嗣마저 책정하지 못하게 되었다가, 뒤늦게야 國人들이 前王의 族子를 세워 王位를 계승하게 하였다. 그때 時事가 岌岌하고 人心이 皇皇하여 싸우고 싶어도 군사가 없고, 지키고 싶어도 軍費가 없는 데다가, 못된 습관은 달라지기 어렵고, 온갖 政務가 너무 혼란해진 때문에, 아군은 아예 固守할 계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적군은 이미 탈취하려는 목적을 달성하여, 마침내 7월 23일에 順化城 아래서 화의를 빌기에 이르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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