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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厓 柳成龍에 대한 一 視線: 17세기『선조실록』과『선조수정실록』의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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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저자사항
西厓 柳成龍에 대한 一 視線: 17세기『선조실록』과『선조수정실록』의경우
도현철[1962-]
발행사항
대구 : 慶北大學校 退溪硏究所, 2014
형태사항
전자자료(Application)PDF28 p.
주기사항
반년간
언어: 영어 요약 있음
서지: 참고문헌: p. 123-124
수록자료: 退溪學과 儒敎文化 第55號 p. 99-126 ISSN 2233-7032
표준번호/부호
ISSN 2233-7032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151.05
주제명
성리학[性理學]   재상[宰相]   
자료이용안내
국립중앙도서관내(디지털열람실 예약 후 이용)에서 이용이 가능합니다.

목차

[목차]

Ⅰ. 머리말
Ⅱ. 생애와 사승
1. 생애와 정치활동
2. 사승과 『퇴계집』간행
Ⅲ. 『실록』의 ‘卒記’와 주자의 재상론
1.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평가
2. 주자의 재상론에서 본 재상 류성룡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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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내용/해제내용

[초록]

16세기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정치 지도자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생애와 17세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기술된 조선시대인의 시선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올바른 모습을 밝혀보려는 것이 본고의 목표였다. 류성룡은 1590년 5월 우의정을 시작으로 7년 10개월 간 재상을 맡아 조선을 이끌어 갔다. 현대 한국 역사학계에서 류성룡은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명재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17세기 기록인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실려 있는 서애의 졸기에는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정권 때 북인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고,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입장이 반영된 사서로, 동인인 류성룡을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두 기록은 부정적인 평가의 근거로 기축옥사와 임진년과 경진년 사이의 주화오국 그리고 재상으로서의 풍모 등 3가지를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주자학의 재상론에 비추어 재상 류성룡을 평가해 볼 만하다고 보여 진다. 주자의 재상론은 군주성학론(君主聖學論)과 재상정치론으로 요약된다. 주자는 천하의 일을 도모하는 최종결정권이 황제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군주의 전제(專制)정치(政治), 독단정치를 비판하였다. 군주는 강명(剛明)공정(公正)한 인물을 재상으로 선택하고 그와 더불어 정사를 의논해야 한다고 하였다. 군주(君主) 일인(一人)에 의한 정치 운영보다는 대다수 신료(臣僚)들의 공론(公論)을 집약하고 국정에 반영한 재상정치론을 주장하였다. 주자의 재상론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재상 류성룡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었 다. 조선 사신(황윤길, 김성일)의 엇갈린 견해에 대하여 동인의 입장이 아닌 서인 측의 일본 침략 가능성을 예지하지 못한 점, 기축옥사로 동인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 시시비비에 대한 명확한 판단으로 조정의 의론을 바로잡지 못한 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붕당의 대립 속에서 재상으로서 국가적 위기에 적극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서애 류성룡에 대한 조선시대의 인식과 평가는 녹녹치 않다. 이를 조선후기 당 쟁의 결과로서만 설명하는 것 또한 불충분하다. 류성룡의 진면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16세기 당대의 사회에 대한 미시적 분석과 함께, 17, 18, 19세기에 이루어진 류성룡에 대한 인식과 평가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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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내용/해제내용

[초록]

Examined in this article is the life of Seo'ae Ryu Seong-ryong(1542-1607), a political leader who led the Joseon society in the 16th century, through the 『Annals of King Seonjo's days』 and 『Revised version of the Annals of King Seonjo's days』 of the 17th century, in order to obtain a proper and correct understanding of the man. Ryu Seong-ryong was appointed to the seat of Wu'eui'jeong in May 1590, and led the government ever since for total of 7 years 10 months. Today he is considered as a wise minister who saved the country from its predicaments. But in the 『Annals of King Seonjo's days』 and 『Revised version of the Annals of King Seonjo's days』 he is portrayed rather negatively. The former reflected the perspective of the Northerners who led the Gwang'had-gun regime, and the latter reflected the position of the Westerners who were in charge of the government since the enthronement of King Injo. Both texts were mirroring the views of people who could not possibly depict him a wholeheartedly positive manner. These texts cited the purge of the Gi'chuk year, the political incident that took place between the Imjin and Gyeongjin years, and also his actions as a minister, as reasons for their negative description of Ryu Seong-ryong. Ryu Seong-ryong as a minister should be evaluated by Ju Hi's own arguments regarding the role of the ministers. Ju Hi argued that the king must engage in studies of the past sages('Gunju Seong'hak-ron, 君主聖學論') and that the ministers should be placed in charge of governing. Ju Hi acknowledged the fact that the ultimate decisions concerning the governance of the state should be left to the emperor, but was also highly critical of the emperors' despotic and arbitrary ruling of the country. He argued that the emperor must choose an impartial and fair individual, and then name him as a minister and also as a partner to discuss the issue of governing with. He argued that instead of leaving the emperor alone to rule the country, many officials should be consulted instead. In the light of Ju Hi's argument on the role of ministers, Ryu Seong- ryong as a minister indeed left some things to be supposedly desired. In facing contradictory reports from official envoys who just returned from Japan(who were Hwang Yun-gil and Kim Seong-il), he failed to recognize the position of the Westerners who predicted the possibility of an invasion from Japan, and later he also failed to properly manage the clashing opinions inside the government during the Gichuk-year purge which cornered the Easterners. In other words, in the wake of conflicts waged among political parties, he was incapable of actively addressing the dynastic crises. Evaluation of Seo'ae Ryu Seong-ryong has not been that positive. Yet trying to explain it away as a mere result of party conflicts of those days would not be fair either. In order to evaluate his life more appropriately, we need to be able to analyze the 16th century Joseon society, and also the evaluations made of Ryu Seong-ryong during the 17th, 18th and 19th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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