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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이미지 그림 한국어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다: 최익현이 지은 『면암집』. 1

책표지 크게보기
표제/저자사항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다: 최익현이 지은 『면암집』. 1
저자미상
발행사항
서울 : 누리미디어, ----
형태사항
전자자료(Image)JPEG이미지 파일 1개 (87.18 KB) : 천연색 ; 446 × 600 pixels
주기사항
1) 사동부승지소(辭同副承旨疏) 최익현은 재야 유생으로서 국가에 사건이 있을 때마다 소문을 올려 의견을 내고 항의를 하였다. 고종이 최익현에게 동부승지의 벼슬을 내려주고 조정에 나오라고 권고하자 이를 사양하며 올린 소문이다. 2) 황묘 만동묘를 말함. 명나라를 황제의 나라라 하여 황묘라 높여 불렀다.
수록자료: 이이화의 한국사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911
자료이용안내
국립중앙도서관내(디지털열람실 예약 후 이용)에서 이용이 가능합니다.

초록내용/해제내용

[초록]

민비의 오라비인 민승호와 조대비의 조카인 조영하가 그녀의 뒤에서 하수인 노릇을 했다. 두 사람은 외척으로서 한때 흥선대원군의 연줄에 따라 참판 직위에까지 올랐으나 정책 결정에 소외되어 있는 처지여서 실세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사실 두 사람은 외척이라는 것 외에는 학술이나 재능 면에서 내세울 것이 없었다. 조영하는 고모인 조대비가 흥선대원군의 전횡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반대세력은 바로 등잔 밑에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은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작은아들 명복(고종의 아명)만을 귀여워하고 집권한 뒤에도 좋은 자리를 주지 않아 늘 불만에 차 있었다. 그는 자주 궁중에 들어가 임금에게 친정을 하라고 충동질하였다. 사위 조경호는 아버지와 아내가 천주교에 연루되어 불의의 죽음을 당했는데 장인에게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러니 흥선대원군은 가족 사이에도 숱한 적을 거느리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은 민비의 정보망에 걸려 그녀의 음모에 놀아났다.
민비는 몇 년 전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강하게 비판한 일을 떠올렸다. 민비의 지시를 받은 민승호가 최익현에게 책사(策士)를 보냈다. 최익현은 포천에서 한가하게 글을 읽으며 지내는 중이었다. 그는 당시 만동묘와 서원의 철폐, 특히 송시열을 깎아내리는 일과 남인·북인의 등용 등에 심한 좌절감을 느끼며 분노하고 있었다. 책사는 흥선대원군의 10년 집정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최익현을 충동하였다. 그리고 임금에게 이에 관한 상소를 올리라고 당부하였다. 정치감각이 예민한 최익현이 마다할 리가 없었다. 공작이 성공해 임금은 그에게 동부승지라는 직함을 내렸다.
1873년 10월, 최익현이 산림처사의 관례대로 벼슬을 사양하는 소문을 올리면서 정치현실을 비판했다.
근래에 옛 법도를 바꾸는데도 사람들은 복종에 익숙해 있습니다. 대신과 여섯 판서들은 정책을 건의한 적이 없으며 언관들과 시종들은 일을 좋아한다는 비방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조정에서는 속된 논의만 자행되고 정론이 사라졌으며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펴고 참된 선비는 은둔합니다. 세금과 부역이 그치지 않아 생민이 어육이 되고 윤리가 무너져 사기가 꺾였습니다.(『면암집』 사동부승지소1))
그는 일반적인 정치 비리를 지적하고 대신들을 공격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퇴진과 고종의 친정을 말하지는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조정의 여론이 발칵 뒤집혔는데 고종은 이를 무마하고 다시 호조참판 벼슬을 내렸다. 최익현은 분연히 붓을 잡고 서슴없이 자신의 뜻을 상소에 담았다.
지금 나라의 일을 보니 폐단이 없는 곳이 없으며 이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한데도 바로잡지 못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몇 가지 뚜렷한 사실을 들어 보겠습니다. 황묘(皇廟)2)의 철거는 군신의 윤기를 저버린 것이며, 서원의 철폐는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끊은 것이며, 귀신을 출후(出后)케 한 것은 부자의 천륜을 문란하게 한 것이며, 나라의 역적을 복권한 것은 충성과 반역을 혼란시킨 것이며, 청나라 돈을 사용하는 것은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을 어지럽힌 것입니다.(『면암집』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
이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이념에 충실하고 전통적인 주자,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 서인 노론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또 흥선대원군은 대군, 왕자 등과 역적으로 몰려죽은 사람들의 후사가 끊긴 경우 일가의 혈통을 지닌 방손을 찾아 대를 잇게 하는데 이는 가족의 종통을 어기는 것으로 “귀신의 대를 잇는다”고 표현하였다.
그는 이어서 토목공사와 원납전 등이 국가 재정과 개인의 살림을 파탄으로 몰았다고 지적하면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모든 일이 임금이 어릴 때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제 친정을 단행하여 의정부와 육조 판서에 책임을 지우고 옛 제도를 모두 복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흥선대원군에 대해서는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작위를 높이고 녹봉을 후하게 주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서원의 폐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노론의 그릇된 행태에 대해서도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외척을 억제하고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 남인과 북인을 등용한 일 등 흥선대원군이 선정을 베푼 것은 전혀 말하지 않고 일관되게 비난만 퍼부었다. 물론 흥선대원군이 물러갈 때가 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임금의 친정을 권유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이 소문이 올라가자 서석보는, 최익현이 부자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지탄하고 “요순의 도는 효제(孝悌)뿐이다”라는 말로 임금이 불효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임금은 서석보를 잡아들여 친히 국문하고 임자도로 유배를 보냈으며, 여론을 의식해 일부러 최익현을 제주도에 안치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전용 출입문을 폐쇄해 버려 흥선대원군은 어쩔 수 없이 운현궁에 틀어박혔다가 나중에 농장이 있는 양주 직곡으로 옮겨가 은거하였다.
고종의 친정이 선포되고 민비가 곁에서 자문이라 할지, 간섭이라 할지, 아무튼 활발하게 자신의 뜻을 정치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먼저 민승호를 이조판서로 삼아 인사권을 맡기고 이유원을 발탁하여 영의정으로 삼았다. 흥선대원군이 발탁한 사람들의 벼슬을 빼앗고 남인·북인을 내쫓았으며, 흥선대원군이 세운 정책을 하나씩 예전의 묵은 제도로 되돌려 놓았다. 민겸호 등 민씨들이 연달아 요직을 차지하였으며 김병시 등 노론과 소론 계열의 인사들이 조정에 들어왔다. 흥선대원군의 작은형으로 흥선대원군을 늘 시기하던 이최응은 좌의정이 되었다. 그 동안 특혜를 받았던 전주 이씨 종친들도 하나둘 쫓겨나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치를 살폈다. 이로써 민씨문벌정치 또는 보수반동정치가 시작되었다.
최익현이 의금부에서 나올 때 도성의 사대붓집 여자들이 횃불을 밝히고 술을 들고 나와 바치면서 ‘최충신’이라고 떠들었으며 최익현의 상소문을 베껴서 돌려 읽느라 종잇값이 올랐다고 한다. 최익현을 떠받드는 자들은 그 동안 흥선대원군에게 소외당해 온 서울의 기득권층 문중 사람들이었다. 이와 달리 영남과 호남의 선비들은 1만여 명의 이름으로 최익현을 규탄하는 소문을 올렸다. 임금이 그 주모자를 잡아 죽이려 하였으나 양주에 은거하던 흥선대원군이 올라와 강경하게 항의해 마지못해 풀어 주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에게 혜택을 받은 남인이었다.
박은식은 이렇게 적었다.
이에 귀족으로 흥선대원군에게서 뜻을 잃은 자들이 서로 갓의 먼지를 털고 달려나와 민씨 가문의 충복이 된 자 날로 늘어났으며, 흥선대원군의 날개가 되었던 자들은 모조리 유배되거나 쫓겨났다. 그리하여 내외의 관계는 드디어 크게 변하였다.(『한국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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