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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이미지 그림 한국어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광해군 시기에 북인이 주도해 편찬한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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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저자사항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광해군 시기에 북인이 주도해 편찬한 『선조실록』
저자미상
발행사항
서울 : 누리미디어, ----
형태사항
전자자료(Image)JPEG이미지 파일 1개 (119.44 KB) : 천연색 ; 600 × 544 pixels
주기사항
수록자료: 이이화의 한국사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911
자료이용안내
국립중앙도서관내(디지털열람실 예약 후 이용)에서 이용이 가능합니다.

초록내용/해제내용

[초록]

이이는 이렇게 날카롭게 현실을 파악하고 선조에게 일대 경장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이는 후배 유성룡이 10만 양병의 주장과 경장을 반대하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유성룡은 재주가 높은 사람인데 나와 함께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 무리가 죽은 뒤 그의 재주를 써먹게 될 것이다.”
유성룡은 조일전쟁이 일어나 군사 일을 보면서 늘 이이를 칭송했다.
“이이는 선견지명과 충성스런 절개가 있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오늘날 틀림없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10만 양병설과 유성룡에 관계된 이야기는 『선조실록』에 실려 있지 않고 『선조수정실록』에만 실려 있다. 『선조실록』은 당쟁이 격화된 광해군 시기에 북인이 주도해 편찬해 서인과 남인에 대한 사실은 왜곡하거나 빼버렸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 1643년에서 1657년에 걸쳐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했다고 한다. 여기에 10만 양병의 주장과 경장을 주장한 글이 새로 실렸다. 이번에는 남인이, 이이와 관계있는 사실이 과장되었다고 지적했다. 역사 기록에 대해서도 당시 번갈아 집권했던 서인, 남인이 주장을 달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으로 풀어서는 진실을 놓치기가 쉽다. 『선조실록』의 1592년 이전, 곧 조일전쟁 직전의 기록은 내용이 부실하다. 하나의 보기를 들어보자. 『선조실록』의 1591년 신묘년 부분은 29장밖에 없다. 연평균치의 삼분의 일 수준이다. 여기에는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정세에 대한 의견이 빠져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국서도 실려 있지 않다. 『선조수정실록』은 새로이 39장을 보충했는데 일본의 국서 등 전쟁 전의 관계 사실을 수록했다. 이 둘을 종합하면 분량도 평균치이고 내용도 그런 대로 갖추게 된다. 이때의 경우에는, 당파의 이해에 따라 실록이 수정되었다는 주장은 정확하지 않다.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이의 10만 양병의 주장이 과장되었더라도 경장의 소문이 엄연히 『율곡전서』에 실려 있고 또 「동호문답」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그의 주장과 개혁책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그의 주장을 허구라고 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당시 일관되게 국방력을 강화해 외국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은 이이를 빼고는 없었다. 유성룡은 뒷날 누구보다도 군사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으니 그가 이이의 선견지명을 칭송했다는 기록도 사실일 것이다. 이이는 일대 경장의 주장을 편 뒤 2년 만에 죽었다.
선조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늦은 감은 있으나 1588년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지역 사령관인 방어사를 새로 임명해 파견했다. 다음해에는 위 세 도의 주요 군사 지점과 북쪽 지대에 유능한 수사와 병사 등 무관을 골라 배치하고, 군사 관계에 밝은 수령을 파견했으며, 남해안의 성을 보수했다. 유성룡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각 지역의 방위체제를 강화하려고 했으나 군역이 문란해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선조는 일본 침략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누가 총사령관인 도원수의 자격을 갖추었느냐고 물었다. 영의정 박순이 정개청이라는 선비가 지혜와 포부가 크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 무렵에 취해진 일련의 조치는 정여립 사건을 겪으면서 흐지부지되거나 중단되고 말았다. 그 결과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조일전쟁을 맞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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