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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한 임금에 현명한 신하: 세종대왕의 업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세종장헌대왕실록(세종실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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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저자사항
영명한 임금에 현명한 신하: 세종대왕의 업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세종장헌대왕실록(세종실록)』. 1
저자미상
발행사항
서울 : 누리미디어, ----
형태사항
전자자료(Image)JPEG이미지 파일 1개 (43.22 KB) : 천연색 ; 600 × 441 pixels
주기사항
수록자료: 이이화의 한국사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911
자료이용안내
국립중앙도서관내(디지털열람실 예약 후 이용)에서 이용이 가능합니다.

초록내용/해제내용

[초록]

세종은 여러 면에서 태종과 확연히 달랐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아니었다. 세종은 22세에 태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상왕(태종)은 한동안 군사권을 물려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왕이 그의 통치 능력을 믿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관은 세종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영명하고 과단성이 있으면서도 신중하고 중후하였으며, 너그럽고 인자하면서 검소하고 효우(孝友)하였는데, 모두 타고난 성품이었다.(『세종실록』 즉위년)
그에 대한 평가는 당시나 후세가 한결같다.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제왕이라면 세종은 창조적인 문화군주였다. 전면적인 변혁을 도모한 혁명가는 아니었으나 유교의 이상정치를 추구한 왕자(王者)였다.
세종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큰 죄를 지은 자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최소의 처벌을 내렸다. 그가 아끼던 후궁의 오라비인 홍유근은 임금의 나들이를 돕는 사복(司僕)이었는데 임금은 그에게 늘 입던 옷을 벗어줄 정도로 아꼈다. 어느 날 연을 탔는데 연을 끄는 말이 절룩거렸다. 그 내력을 알아보니 본디 연 끄는 말은 홍유근이 타고 저는 말로 연을 끌게 하였던 것이다. 세종은 시위에게 “만일 대간이 이 일을 알면 죽일 것이니 소문을 내지 말라”고 이르고 홍유근에게는 걸어서 오라는 처벌을 내렸다. 대간이 알고 그를 죽여야 한다고 건의하자 멀리 도망치라고 이르고 궁에서 내보냈다.
양녕대군은 백성들의 논밭을 짓밟고, 양가의 여자를 겁탈하는 따위 온갖 말썽을 부렸다. 심지어 아들의 첩을 빼앗기도 하였다 한다.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지탄을 퍼부어도 큰 소리를 치며 막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다..
동생인 왕이 언제나 지극한 우애로 대하고 효령대군이 열심히 부처를 받들기 때문에 이런 농지거리를 한 것이다. 대간에서 그를 유배보내거나 처벌하라고 요청하였으나 세종은 끝까지 감싸고돌았다.
세종은 잠시도 책을 손에서 뗄 줄 몰랐다. 총명한 자질을 가진데다 읽고 또 읽어 누구보다도 높은 학문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의 일을 구상하고 신하들의 조회를 받고 정사를 논하였으며, 경연 자리에 나가 학문을 토론하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그는 역사, 철학, 문학, 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친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집현전(集賢殿) 학사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훈민정음 창제 등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냈으며,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같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세종은 별실을 지으면서 돌층계를 쓰지 않고 짚으로 지붕을 이게 하였다. 그는 조용한 이곳에서 독서에 열중하였다. 문 앞에 짚자리를 깔아놓은 것을 보고 시키지 않은 짓을 하지 말라 이르고 곧 걷어냈다. 호조에서 백성들이 공물로 바치는 금은을 탕감해주고 대신 해동청(海東靑:보라매)을 받자고 요청했으나, 보라매는 날마다 꿩 한 마리를 먹여야 하고 길들이는 데도 노력이 많이 들며 백성들에게도 폐해가 된다며 기르던 매들마저 놓아 보냈다. 그는 소갈증(당뇨병)으로 고생하였는데, 시의가 양고기를 날마다 장복하면 효험이 있다고 하자 양고기는 본디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여 먹지 않았다. 임금의 검소한 생활은 벼슬아치는 물론 궁중에도 영향을 끼쳤다.
어느 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어린 후궁이 청탁을 넣었다.
“어린 계집아이가 벌써부터 청탁을 넣으니 커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이다.”
임금은 엄격하게 말하고 다시는 그 후궁을 가까이 부르지 않았다. 사정(私情)과 공사를 엄격히 구분한 것이다. 이러한 인격을 갖춘 성군이었기에 황희(黃喜), 허조(許稠), 맹사성(孟思誠), 김종서(金宗瑞) 같은 명신이 나올 수 있었다.
황희는 임금의 의향을 잘 알아차리고 받들었다. 그는 청렴결백한 벼슬아치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정사를 빈틈없이 수행하였다. 뒷날 허균은 그를 두고 “임금의 뜻을 잘 맞추었으나 스스로 개혁을 도모하지 않았다”고 평가하였지만 그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재상으로 꼽힌다.
허조는 이조판서로 있을 때 인사를 공정하게 처리한 것으로 유명하고, 좌의정 시절에는 황희를 도와 청렴하고 공평한 기풍을 진작하였다. 그는 임금과 의견이 다를 때에도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소신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밤깊도록 책을 읽고 있는데 도둑이 들어 살림살이를 몽땅 털어갔다. 그가 깨어 있을 때 일어난 일이라 집안사람들이 더욱 분통하게 여기자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이보다 심한 도둑이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바깥 도둑을 걱정하리요.”
맹사성은 대제학 등 주로 문한의 일을 맡아보았으며, 재상의 반열에 들었어도 결코 거들먹거리지 않고 일생 동안 겸손한 자세로 살았다. 집에 비가 새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고향에 갈 때 남루한 옷차림으로 다녀 고을 원이 일개 선비로 보아 소홀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으며, 소를 타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종서는 황희의 추천으로 조정에 나와 혁혁한 공을 쌓았다. 함경도 지역의 국경 방비를 맡아 여진을 다스리고, 6진을 개척하여 국경을 확장하는 공로를 세웠다. 기질이 드세고 술을 좋아했으나 자기의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충직한 벼슬아치로서의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 세종의 뜻을 받들어 『고려사』를 편찬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말고도 명신과 유능한 벼슬아치가 조정에 널려 있었고,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 나라일을 도왔다.
세종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고 신하들의 바른 말을 잘 받아들였으며, 유학 사상을 학문과 수양의 근본으로 삼았으나 이단을 탄압하지는 않았다. 그는 종종 내불당을 찾기도 했지만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의 비리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는 이처럼 악연(惡緣)을 짓지 않았는데 아들들이 왕권을 두고 골육상잔을 저질렀으니 이 한 가지가 그의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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