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메인메뉴 국립장애인도서관홈페이지 바로가기

닫기

보존용자료이용 안내

닫기

책표지

검색히스토리

닫기

검색히스토리

* 보유한도 건수는 10건입니다.
검색히스토리 목록
자료구분 검색질의어 검색건수
     

상세검색

상세검색 닫기
자료구분 선택
단행자료
연속자료
멀티미디어자료
장애인자료
웹정보자료
선택된 자료구분
  • 자료구분 선택
도서 상세 검색
도서 상세 검색
분류기호 참조
청구기호 검색
한국대학명
코드명
대학명 참조
한국정부기관명
코드명
정부기관명 참조
도서 상세 검색
발행년도 년 부터
소장기관 검색
판종유형/판종
내용형식
KDC 주제
주제명을 이용한 검색

주제명을 통해 자료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1. 주제를 입력하세요

주제명찾기
주제어 찾기

이용안내

검색방식 안내. 전방일치: 입력하신 키워드로 시작하는 주제어, 후방일치:입력하신 키워드로 끝나는 주제어, 부분일치:입력하신 키워드 포함하는 주제어

  • ① 검색방식
    • 전방일치- 입력하신 키워드로 시작하는 주제어
    • 후방일치- 입력하신 키워드로 끝나는 주제어
    • 부분일치- 입력하신 키워드 포함하는 주제어
  • ② 주제 입력란에 검색어를 입력하시고 [주제어 찾기]버튼을 클릭합니다.

2. 주제어를 선택하세요

목록

3. 주제어를 모아 검색할 수 있습니다.

선택된 주제명

[검색결과: 0건] 주제명을 선택하세요

이미지 이미지 그림 한국어

상아와 향료를 갖고 온 아라비아 상인: 시라카와천황. 1072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왕위에 올라 친정을 하다 1086년에 호리카와(堀河)천황에게 위를 물려주고 상황(上皇)이 되었다. 그는 상황이 정치적 실권을 쥐는 원정(院政)을 시행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내란을 평정하고 권력을 휘둘렀다. 천황도 별도로 무사단을 조직하여 원정의 후원세력으로 키웠다.. 1

책표지 크게보기
표제/저자사항
상아와 향료를 갖고 온 아라비아 상인: 시라카와천황. 1072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왕위에 올라 친정을 하다 1086년에 호리카와(堀河)천황에게 위를 물려주고 상황(上皇)이 되었다. 그는 상황이 정치적 실권을 쥐는 원정(院政)을 시행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내란을 평정하고 권력을 휘둘렀다. 천황도 별도로 무사단을 조직하여 원정의 후원세력으로 키웠다.. 1
저자미상
발행사항
서울 : 누리미디어, ----
형태사항
전자자료(Image)JPEG이미지 파일 1개 (59.28 KB) : 천연색 ; 361 × 600 pixels
주기사항
수록자료: 이이화의 한국사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911
자료이용안내
국립중앙도서관내(디지털열람실 예약 후 이용)에서 이용이 가능합니다.

초록내용/해제내용

[초록]

고려는 일본과도 무역 교류를 텄다. 신라 말기에 왜구가 자주 노략질한 사실을 아는 고려는 일본과 국교를 트지 않고 있었다. 1019년(현종 10) 고려 해군이 동여진의 해적선에서 일본인 남녀 259명을 포로로 잡은 적이 있다. 고려는 노인송사(虜人送使)를 딸려 이들을 일본에 보내주면서 비로소 호의를 보였다.
그뒤에 일본은 고려의 표류민을 보내주었고 쓰시마섬을 통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고려의 문종은 병에 시달리면서 일본에 명의를 요청하였다. 당시 일본은 시라카와천황(白河天皇) 시대로 귀족세력은 장원을 경제적 기반으로 많은 공물을 받으면서 윤택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장원의 영주와 호상(豪商)들은 송의 상선을 통해 고급스런 물품을 구입하여 사치한 생활을 누렸다. 처음에 이들은 송의 상선이 오기만을 기다렸으나 나중에는 스스로 상선을 건조하여 대외무역에 나섰다. 11세기에 들어 일본인들은 지리적 이점과 상품의 가치를 따져 고려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11세기에만 9회에 걸쳐 300여 명의 일본 상인들이 고려에 왕래하였다. 일본에는 무인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규슈 지방의 유력한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교역에 참여하였다.
1056년(문종 10)에 일본인 42명이 ‘진봉선’(進封船:봉물을 바치는 배)에 상품을 싣고 김해의 객관에 이르렀다. 또 이키섬의 구당관(勾當官:실무 책임자)인 후지와라(藤原安國)가 이끄는 일본인 33명이 고려의 세자와 대신들에게 방물을 바치겠다고 요청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세자와 대신에게만 방물을 바치고 국왕에게는 바치지 못하게 하였으며, 개경으로 올 때 해로를 이용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는 일단 무역은 허락하지만 방물을 바치면 답례품이 따르기 때문에 국왕과는 통교하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육로로 통과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일본에 군사·지리의 기밀을 누출하지 않으려는 경계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바다를 통해 벽란도를 거쳐 개경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가져온 물품은 수은, 유황, 구리, 진주, 안장, 칼, 거울, 책상, 향로, 부채, 활, 화살, 갑옷, 후추, 물소뿔, 귤, 소라껍질 따위의 공예품과 남쪽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이나 수산물이었다. 일본인들이 가져간 물품은 옷감, 도자기, 인삼, 쌀, 콩, 마포 등 공예품과 양곡이었다. 특히 송나라에서 수입한 비단과 책을 가져가기도 하였다. 고려는 송나라의 제품을 중개무역하였던 것이다.
일본과의 무역은 송과 달리 제한적이기는 하였으나 11세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고려 말기 왜구의 침입 때까지 유지되었다. 두 나라 사이에도 사무역과 밀무역이 이루어졌는데 그 실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1024년(현종 15)을 시작으로 하여 대식국 상인들 수백 명이 세 차례에 걸쳐 고려에 들어왔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당나라 때부터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 남부의 광주항을 거점으로 무역 활동을 하였다. 송나라 시기에 이들의 무역 활동은 더욱 왕성하였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송 상인을 통해 고려 무역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고려 상인을 광주항에서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이들의 상업 욕구는 직접 고려 땅을 밟게 만들었다. 아라비아 상인이 가져온 물품은 수은, 상아, 향료 등이었다. 고려는 물건값으로 비단을 주었으며, 개경에 머물면서 자유롭게 다른 물품을 구매하도록 허락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아라비아의 비단 짜는 솜씨가 유명한데 아마 이때 고려에서 배워갔을 것이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계속 고려에서 무역 활동을 벌이지 못한 것은 송 상인들이 중개무역의 이익을 노려 방해하거나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공식무역 이외에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밀무역을 통해 상인들끼리 서로 상업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특히 고려의 상인들은 외국 상인과 결탁하여 연안에서 밀무역 거래를 활기차게 벌였다.
밀무역을 막으려고 중앙정부에서는 벽란도에 감검어사(監檢御史)를 보내 적발하도록 하였다. 감검어사는 밀무역을 벌이는 송나라 상인을 잡아 태형을 가하는 처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엄하게 통제하고 감시해도 밀무역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때에 이루어지던 밀무역은 근대적 의미의 자유무역이었다.
신라 말기에 침체되었던 무역을 이렇게 활발하게 벌인 탓으로 벽란도에는 배와 돛대가 숲을 이루었고, 개경은 외국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걸음으로 온종일 시끄러웠다. 비록 사치품을 많이 들여와 왕실과 고관 부호의 호사스런 생활에 제공되는 폐단도 있었으나 무역은 나라의 재부를 늘리고 사람들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주었다. 고려는 무역을 통해 수요가 늘고 안목이 높아져 기술 집약적인 상품과 높은 기술이 요구되는 고려청자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펼쳐보기

관련 분야 최신자료

관련 분야 인기대출자료

퀵메뉴

  • 메일링서비스 신청
  • 협약도서관 안내
  • 사서에게물어보세요
  • 프로그램 다운로드
맨위로
  • 페이지 위로
  • 페이지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