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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걸중상과 대조영 부자의 등장: 발해의 건국 사실을 기록한 『아방강역고』 『구당서』 『신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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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저자사항
걸걸중상과 대조영 부자의 등장: 발해의 건국 사실을 기록한 『아방강역고』 『구당서』 『신당서』
저자미상
발행사항
서울 : 누리미디어, ----
형태사항
전자자료(Image)JPEG이미지 파일 1개 (33.69 KB) : 천연색 ; 232 × 600 pixels
주기사항
수록자료: 이이화의 한국사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911
자료이용안내
국립중앙도서관내(디지털열람실 예약 후 이용)에서 이용이 가능합니다.

초록내용/해제내용

[초록]

신라가 한창 전쟁의 과실을 챙기고 내정을 다지는 사이 압록강 북쪽의 땅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나라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여러 곳으로 끌려가 살았고, 스스로 말갈지역이나 거란지역으로 흩어져 정착하기도 했다. 고구려 부흥군은 보장왕이 안동도호부에서 당으로 끌려간 뒤 부흥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지 못하였다. 당나라는 686년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高寶元)을 축소 개편한 안동도독부(도호부의 아래 기구)의 도독으로 삼아 보내려다가 사양한 탓으로 중지하였다. 실제로 안동도독부는 제구실을 하지 못하여 고구려 유민을 통치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뒤에는 다시 도호부로 바꾸는 등 점령지정책의 잦은 변화를 보였다.
영주(營州)는 당의 동북방 침략의 전진기지였고 또 이곳의 여러 민족을 제압하는 근거지였다. 7세기초 만주 동북지방에는 말갈족이 일곱 부(部)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속말부(粟末部)는 송화강 유역, 곧 지금의 길림시를 중심지역으로 삼아 살고 있었다. 이곳은 원래 부여가 중심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말갈족은 한때 고구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수(隋)나라에 보호를 요청한 적도 있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면서 말갈족을 받아들여 영주에 살게 하고, 극진하게 보호하는 척하면서 때때로 고구려 침략에 내몰았다. 그뒤 당나라도 수나라의 정책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양면으로 써먹었다. 다른 말갈족은 대부분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동맹자가 되었다. 고구려가 멸망당한 뒤 당나라는 많은 고구려 유민과 거란족·말갈족을 영주로 옮겨 살게 하였다.
걸걸중상(乞乞仲象)과 대조영(大祚榮) 부자도 가족과 종들을 데리고 와서 이곳에 살았다. 이들 부자는 속말부 추장이었다고도 하고 고구려 장수 출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 사람으로 장수 노릇을 하다가 강제로 영주로 끌려와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출신과 신분으로 보아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집단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유민들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영주도독 조문홰(曹文椽)는 철저한 중화주의자였다. 그는 이곳에 사는 소수민족들을 심하게 학대하였다. 이에 반발한 거란의 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거란의 군사를 모아 696년 도독 조문홰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진충의 거사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합세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들은 도독을 죽인 여세를 몰아 영주를 차지하고 한때 세력을 떨쳤으며, 당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는 등 완강한 자세를 보였다. 당나라 조정은 이때 토번 정벌에 여념이 없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사단이 불거진 것이다. 이진충의 세력이 크게 떨치자 당에서는 이진충의 이름을 “깡그리 없앤다”는 뜻을 따서 이진멸(李盡滅)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였고, 손만영을 “만번이나 목을 벤다”는 뜻을 따서 손만참(孫萬斬)이라고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 이들을 토벌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말이다. 당나라는 많은 토벌군을 보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1년이 지나도록 패전을 거듭했다. 고구려 유민인 걸걸중상과 말갈의 추장인 걸사비우(乞四比羽)는 반란군의 지휘자들이었다.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영주 동쪽의 여러 성을 차지하고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이들은 옛 고구려 지역을 중심으로 당에 저항하여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거란군이 서쪽에서 당군과 싸우느라 힘을 소모하고 있을 때 이들은 후방에서 별 피해 없이 점령지를 넓혀나갔다.
다음해에 측천무후는 어쩔 수 없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통적인 수법을 쓰려고 북쪽에 있던 돌궐족을 동원하였다. 돌궐의 추장 묵철(默啜)은 당군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고구려 귀족 출신 유민인 고문(高文)은 여하도(濾河道:지금의 요령성 금주 방면) 토격대사(討擊大使)의 소임을 받고 아들 고자(高慈)와 함께 싸움터에 나섰다. 두 부자가 얼마나 전과를 올렸는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마미성(磨米城:지금의 요양과 심양 부근)에서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고국 땅에서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되었다가 죽은 것이다.
이즈음의 전투는 영주를 벗어나 요동 땅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거란족은 한때 승세를 탔으나 돌궐의 참전으로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장수 이해고(李楷固)가 항복한 뒤 거란군은 지리멸렬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1년 넘게 전투를 벌인 끝에 끝내 주력부대가 괴멸되었다. 이때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대조영은 영주를 빠져나와 계속 동쪽으로 진출하였다. 거란족이 일선에서 싸울 때 한편으로는 참전하면서 한편으로는 피해와 소모를 줄여 적절한 시기를 골라 빠져나온 것이다.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요동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각기 왕이 되었다. 이 기간은 길지 않았다. 걸걸중상은 태백산(지금의 백두산)의 아래쪽에 일단 자리를 잡았다. 측천무후는 이들이 많은 세력을 거느리고 영주에서 빠져나간 사실을 알고 무척 당황했다. 측천무후는 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책봉하였다. 국공은 왕 아래에 있는 3등 작위에 해당된다. 이 책봉은 이들의 실체를 인정한 것이다.
두 사람은 측천무후의 회유를 물리쳤다. 허국과 진국이라는 나라이름은 측천무후의 일방적인 명명이 아니었다. 뒷날 대조영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나라이름을 진국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진국이나 허국을 표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걸걸중상은 새로운 나라, 곧 고구려의 뒤를 잇는 국가 건설에 매진하였다.
측천무후는 회유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 출신 장수 이해고에게 대군을 주어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해고군과 먼저 전투를 한 것은 걸사비우였다. 걸사비우는 첫 전투에서 죽었다. 장수를 잃은 말갈족은 대조영이 이끄는 군대에 합류하였다. 이 무렵 대조영이 모든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걸걸중상도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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